Jul 21
예수님의 리더십
건축설계 업을 하는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6.25 한국 참전용사 기념관 앞에 있는 Tower 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공사까지 맡아서 완공한 다음에 시(市)에 기증하신 분이다. 이번에 큰 Project 를 땄노라고 골프장에서 만나자고 한다. 골프장 안에 이렇게 화려한 식당이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던 일이다. 그 부부는 자주 왔었는지 들어서자마자 척 알아보고 귀빈대우를 해준다. 우리 예수님 덕택에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니 황송하기도하고 감사하기도한 정말 묘한 기분이다. 내가 목사가 아니면 이 분들이 자기들의 좋은 일에 나를 부르겠는가? 더구나 이 비싼곳으로 불러 내겠는가?
사실 편한 복장에 찌게백반이 나에게는 더욱 어울리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는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하지만 한번쯤 귀빈 대우를 받는것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좋으니 음식도 까르끔하고 맛있다.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대한민국 시국에 대하여 그리고 결국은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으로 흘러갔다. 대충 요약해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나는 소통 대통령이 되겠다” 고 공약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였고, 그리하여 국민들은 “드디어 내 말을 들어 주는 대통령이 탄생하겠구나” 라며 많은 사람들은 기대하였다. 나라님께서 백성들의 이야기도 좀 들어 주시겠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소통이 리더십의 가장 핵심이라는 것을 그분은 잘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들의 가장 큰 문제점도 바로 소통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년 후 그 분의 모습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통행이다. 전직 대통령들보다 더욱 막무내기 라는 의견들이 많다. 사람이 변한 것일까? 본래 그런 사람이었는가? 누구나 그 자리에 올라가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물론 소통은 리더십의 가장 핵심이지만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것임을 또 한번 증명한 셈이 된 것입니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우리 목회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섬기시는 교회 목사님은 물론 아주 훌륭하신 인격자이시지만, 그래도 고집이 세시다는 것을 가끔씩 느끼지 못하십니까? 교인이 300명만 되어도 교회 안에 여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가려면 자연 고집스러워 집니다. 대통령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고집스러워져야 하고 목회자는 예수님과 교인들을 위하여 고집스러워져야 하는데 때로는 자신을 위하여 피우는 고집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실망하고 그러다 보면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자, 설계사도 설계도를 통하여 소통을 합니다. 그 설계도가 얼마나 잘 되었느냐는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잘 소통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한 Project 에 여러 사람들이 응모를 합니다. 그런데 그 경쟁에서 이기려면 소통이 잘되게 그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통을 잘하려면 설계 용어와 도면을 통하여 자기 의사를 정확히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대통령도 자기 속 에있는 것을 그대로 말씀해 주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며 따진다.
그렇습니다. 말 못하는 컴퓨터도 입력만 정확히 집어넣으면 아주 정확하게 계산해주고 정확히 그려냅니다. 컴퓨터는 스스로 생각하지도 만들어 내지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Manipulation 할 줄도 거짓말 할 줄도 모릅니다. 기계는 감정도 없이 들어오는 대로 반응하기 때문에 당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나아가면 당신 컴퓨터는 당신이 명령한 그대로 반응하게 됩니다. 당신이 아무리 화를 낼지라도 당신의 컴퓨터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도 당신의 컴퓨터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여전히 똑 같은 반응을 할 것입니다. 체면도 상황 파악하는 것도 없습니다. 환경에 상관없이 그저 액면 그대로 반응합니다. 또한 기계는 소위 말하는 Body Language 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Computer Language 는 우리의 언어에 비하여 아주 간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 방법이 단순하고 오해할 소지가 거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소통하기 훨씬 쉬운것 이닙니까?
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 듣게도 되고 (Selective Listening) 그로 인하여 오해도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고 감정이 실리고 심하면 손발짓이 뜨르게 되지않습니까? 때로는 아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거나, 듣기만 해 주거나, 그저 웃기만 하는 것도 소통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설계도 그리는 Program 이 복잡하고 다양하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언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단순한 Language 를 사용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라고 설명을 했는데, 아직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그런데 사실 대통령의 소통방법에 문제가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종시나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좀 기울여 주면 될 텐데, “이 사업은 바로 여러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라는 구호를 반복하며, “지금은 이렇게 반대하지만 해놓고 나면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라는 태도는 국민들의 반감만 더 사게 된다 는 사실을 정말 모르실까? 대통령께서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선포했다 할지라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통령만 옳고 나머지 백성들은 다 틀렸다는 의미로 들릴 텐데, 과연 납득이 잘 가는 표현일까?
중학교 다니는 아들에게, “학원에 등록해 놓았으니 빠지지 말고 꼭 다녀라, 다 너 잘되라고 없는 살림에 큰 돈 들여서 하는 것이다. 지금은 듣기 싫겠지만 이 다음에 좋은 대학에 가고 나면 나를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라고 하였더니 왜 자기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했느냐고 짜증을 부린다. 너를 위한 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라고 설득하였지만 아이는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다는 그 자체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주님은 소경거지 바디메오가 부르자 그의 말을 들어 주셨다. 어린아이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집에도 가셨고,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각계 각층의 온갖 사람들과 다 소통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항상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 만은 아니었다. 입술이 마를 정도로 Tension 이 있을 때도 있었고 호되게 책망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돌로 맞으실 뻔도 하였다. 중요한 것은 분위기나 나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와든지 소통은 잘 되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통을 이처럼 가능하게 하셨을까?
진실함이다. 주님은 진실 그 자체였다. 인기에 연연해 하시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진실을 말씀하셨고 진실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 진실을 위하여 사신다는 것을 삶을 통하여 보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멧세지는 실용이나 중용이나 보수나 진보등으로 포장된 무지개 색깔이 아니라 항상 간단하고 명료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잘 들어 주셨다. 직위나 노소에 상관없이 귀를 기울여 잘 들어 주셨다.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흑암에서 죄책감에 시달려 사는 한 여인을 위하여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수가성까지 그 먼 길을 찾아가셔서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들어 주셨다. 너희들도 이렇게 사역하라는 멧세지가 아닌가?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 김 진환 목사
www.riveroflifesj.com
No responses yet 리더십 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