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4

예수님의 리더십

Posted by on May 14 2010 at 09:44 am

요즘 부산 여중생 사건의 주범인 김길태에 대한 기사가 주요 일간지의 톱 기사로 등장하고있다. 물론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 준다는 의미에서 상세히 보도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때에는 “내 가슴도 이렇게 치밀어 오르는데 만일 이 기사를 피해자의 가족이, 특히 그 부모가 본다면 얼마나 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Shocking 한 소식을 전하여 구독자를 늘리려 하는 신문사의 상술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여하튼 우리사회가 왜 날이 갈수록 이렇게 타락하여가고 있는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여중생의 가족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가해자의 가족도 그리고 이런 끔찍한 소식을 접하는 우리 모두가 다 피해자들이다. 그를 낳아 정성스럽게 길러준 부모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들의 죄 때문에 가슴이 타 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죄는 우리가 져놓고 벌은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모습이 떠올라 내 마음을 더욱 쓰리게 하였다.

김길태가 고성을 지르며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득남하였다고 얼마나 기뻐하였을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놈 참 잘 생겼지요? 나를 아주 빼 닮았다니까요” 하면서 자랑도 하였을 것이다.

그 역시도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자랑스런 아들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지만 사람들은 당신의 태어남에 기뻐 웃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죽을 때 당신은 웃으면서 가고 당신을 아는 사람들은 당신을 다시 볼수 없다는 것 때문에 울게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라고 말하였던 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슐트(Dag Hammarskjöld) 가 생각이 났다.

1961년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콩고 문제를 해결하려 가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생을 마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생을 마칠까를 생각하며 일을 처리한 현명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에는 유럽, 특히 벨기에, 영국,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가 콩고 문제에 정치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에 빚어진 사고라고 추정되지만, 여하튼 그의 죽음은 그가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기를 원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특히 콩고에 대한 UN의 정책에 반대하였던 John F. Kennedy 는 그의 죽음 앞에서, “그 분과 비교했을 때 이제야 내가 얼마나 소인배였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금세기의 가장 크신 분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였다.

신문은 끔찍한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구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에서 그치지만, 피해자의 가족은 물론 가해자의 부모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왜 내 딸이 그날 그 장소에 있게 하였던가? 평소에 조금만 더 주의를 주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 모든 것이 내 탓이야, 딸아 너를 지켜주지 못한 못난 이 아비가 너무도 미안하고 죄스럽구나” 라며 탄식하는 아비의 상처를 누가 치료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어도 우리 아들이 이런 끔찍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내가 조금만 더 사랑으로 대하였어도 이렇게 비뚤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곧 사형을 당할 텐데 내가 어떻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모든 것이 바로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라며 죄책감의 고통 속에 흐느끼는 아비의 마음을 누가 치료해 줄 수 있을까? 또한 평생 가슴에 “살인자의 아버지”라는 딱지를 붙인 채 살아가야 할 그의 피 멍이 든 가슴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이러한 피해를 입은 부모님들 중에는 분노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이민을 가거나 급기야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보복을 한다고 해도 이미 가버린 자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죄책감에 빠진 자신을 용서하면 된다고 쉽게 말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여기에 함마르슐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용서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이 용서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을 용서하세요. 그리고 당신 자신을 사랑하도록 노력하세요” 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자기 스스로를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아빠, 그것은 아빠의 잘못이 아니야. 아빠는 나에게 항상 좋으신 분이야” 라는 죽은 딸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추락한 비행기 안에서 발견된 함마르슐트의 가방속에는 마틴 부버가 쓴 “Thou and I(너와 나)” 라는 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콩고로 가던 중 아마도 이 책을 읽었었던 것 같다. 무슨 뜻인가? 모든 문젯거리나 해결책은 결국 “관계” 에서 온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항상 관계를 맺고 혹은 관계를 끊으면서 그러면서도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가 맺고 다시 끊는 그 모든 관계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요 다른 하나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접목이 되어있을 때 비로소 이웃과도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접목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셨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죄는 다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피해 여중생 가족이나 김길태 가족처럼 분노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가족끼리도 관계가 절단된 상태에서 고독과 씨름하며 소망 없이 사는 분들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이며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지금은 특히 고난주간이다. “내가 곧 길이라” 고 하신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하여 당신의 몸을 찢어 다리를 놓으셨다. 그러므로 그 피의 다리, 주님의 몸을 밟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수 없다. 나를 위하여 가슴을 찢고 양팔을 찢어 만든 주님의 다리, 그 다리를 밟는 체험이 없이 죄 덩어리인 내가 감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또한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없으면 아버지와의 끊어진 관계도 회복될 수 없으며, 마음의 상처도 치료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 만이라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의 내적 치유를 위하여, 그분들도 주님의 산산이 찢기고 피범벅이 몸을 밟고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 김 진환 목사    Riveroflifes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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