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07

광야로 내몰린 예수님

Posted by on Mar 07 2010 at 08:41 pm

마가복음 1:9-13절

여러분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 광경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침례 요한은 수염은 앞가슴까지 모두 가리고, 그의 긴 머리는 어께를 넘어서 허리까지 내려오고, 여기에 나귀 가죽을 두른채 메마른 사막의 한 바위에 서 있습니다.
얼굴은 온통 수염으로 둘러쌓여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두 눈은 광채가 납니다.
그 밑에는 예루살렘등 유다 각 사방에서 몰려온 수 많은 사람들이 갈급한 심정으로 두 손을 들고 “오, 하나님 도와 주옵소서, 우리를 로마의 학정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며 외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향하여 요한은 불같은 눈을 번득이며, “회개하라” 고 외칩니다.
그러자 회중들은 “아멘, 아멘” 합니다.

그러한 회중들을 요단강으로 인도하여 한사람씩 한사람씩 침례를 줍니다.

침례를 주다보니 그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있습니다.
그러자 침례요한은 눈을 부릅뜨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고 호통을 칩니다.
그들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조아리고 침례를 받습니다.

이처럼 요한이 한참 침례를 주고있을 때,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를 떠나 요단 강으로 나아오십니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아버지가 하던 목수일을 그만두고 괴나리 봇짐을 싸서 동으로 동으로 요단강 쪽 광야를 향하여 오십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결혼하여 자녀를 여럿 두었을 나이인데, 주님은 결혼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오신 것입니다.

얼마를 걸리셨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하루 이상은 걸려서 요단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침례받는 사람들의 행렬에 서서 침례 요한으로 부터 침례를 받게 됩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요한의 회개의 침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첫눈에 이분이 보통 사람은 아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침례 요한도 Anointing,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자마자 자신보다 훨씬 깊고 강한 기름부음이 있으신 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앞에서 겸손하게,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라고 여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3:15절에,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침례 요한의 원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그 당시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알려진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주었다면 상황은 여러면에서 암청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겸손하게 침례 요한으로 부터 침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이룬다는 의미이며,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거치는 단계이며, 또한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계시를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10-11절에, “곧 물에서 올라 오실 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물에 침례를 받으시려고 물속에 잠기셨다가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막혀있던 것이 이제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막혔던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고있었던 장벽이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이제껏 막혔던 담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물어짐으로써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많은  우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부터 신령한 축복들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예수님에게  내려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성령님이 예수님께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는 이제 예수님이 그 성령으로 충만하시며, 성령에 사로잡히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성령의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역을 하실 것이며,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음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과 권한을 다 받으셨음을 예수님도 알고 옆에 있던 침례 요한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백전 백승할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세를 주셨고,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늘 함께 하실 것임을 확증하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하며 기쁨이 넘치는 일입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바로 후에,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 내신 지라 광야에서 40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처하셔서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방금 비둘기처럼 예수님의 어께에 내려앉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강제로 광야로 몰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시험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성령이 당신 위에 임하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고 확증하여 주셨는데,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권세가 임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예루살렘이나 헤브론 등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많은 이적이 나타나고,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데, 왜 광야로 내 몰림을 당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게 되십니까?
성령님이 임하셨으면 엄청나게 좋은 일이 생겨야 하는데, 낮에는 뜨거운 태양과 밤에는 취위에 시달리며 먹을것은 커녕 마실 물도 없는 왜 그 고난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까?

논리적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큰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큰 사역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실수 있도록 마음속의 모든 불순물이 빠져나가도록 광야로 내 보내는 것입니다.
광야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대 일로 다시 만나게 되고, 그 분의 사랑에 다시 압도되어 마침내는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잘못, 비판등도 포용할수 있게되는 큰 그릇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식민지 생활에서 나오자 뒤에서 이집트 병사들이 추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에는 홍해바다였습니다.
이제 이집트 병사들은 곧 들이닥쳐 칼날을 휘두를텐데, 그렇다고 바다에 뛰어 들수도 없고, 정말 어떻게 할수가 없자 그들은 모세를 이렇게 원망하녔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애굽기 14:13-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찌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고 하십니다.
모세가 그대로 하자 너른 홍해바다가 싹 갈라지고 바다가운데 길이 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무사히 건너갔지만, 뒤따르던 이집트 병사들은 바닷물속에 다 빠져 죽었습니다.
이제는 안전하게 홍해 바다를 건넜고 또한 자기들을 추격하여 오던 원수들이 다 빠져 죽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들은 거기가, 즉 홍해바다만 건너면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광야로 들어가는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춤을 추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젖과 꿀은 고사하고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할수 없는 끝없는 광야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지금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훈련 한번 받아보지 못했고 전쟁한번 치르지 않았으며 그저 남녀노소 함께 뒤범벅이 된 오합지졸들입니다.
이런 오합지졸들이 그냥 그 상태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가나안의 훈련된 병사들에게 다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광야생활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며 사는 법을 배우게 하셨고, 또한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전쟁에 나갈만한 병사들을 선별하였고, 나팔 소리로 모이고 흩어지고 또한 돌격하는 등의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 40년 동안의 철저한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다져졌고, 또한 군사훈련을 받은 까닭에 가나안의 병사들을 파죽지세로 섬멸하였던 것을 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보면 훈련을 더 받으라고, 더 큰 그릇이 되라고, 더 중대한 사역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광야로 내 모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미 모두 준비된 그릇이셨지만 이렇게 하신 것은, 누구든지 우리의 모든 면에 모본이 되신 예수님처럼 사역하려면 예수님의 Foot Step 을, 심지어는 십자가의 고난까지도 따르게 될 것이라는 예증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보거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 주님의 소중한 사역을 감당하는 분 치고 광야생활을 하지 않으신 분이 없습니다.

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William Carry 는 인도로 선교를 갔는데, 1년 내내 한명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큰 아들이 죽자 자기 아내는 미쳐버립니다.
이것이 이분에게는 광야의 고초였습니다.
하지만 그 고초가 지나자 전도길이 활짝 열리고, 인도내의 26개 이상의 부족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폐병으로 죽음을 드나들다가 예수를 믿고 새생명을 얻어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폐병이 광야의 고초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 교회 건물을 짓다가 부도가 나자 성도들은 다 떠나 버렸고, 짓다만 건물의 철골은 빨갛게 녹이슬어 콘크리트를 깨고 그 녹슨 철골을 다시 뽑아내는 공사를 해야하고, 은행에서 대출은 안해주고……
마침내는 자살까지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짜피 죽는것 기도하고 죽겠다고, 그 문제를 놓고 밤낮으로 기도하였는데 , 그 얼마후 한 조그만 은행에서 대출을 해 주더랍니다.
비록 큰 돈은 아니었지만, 그 돈으로 공사를 다시 시작하며 힘을 얻어 오늘날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건축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종요기 목사님이 거쳐간 광야의 고초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광야의 고초를 통하여 그분의 영성이 깊고 커졌으며, 더욱 큰 그릇으로 만들어져 그 큰 교회를 이끌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일본에 휴대전화 케이스를 납품하는 한 중소기업 사장이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더군요.
처음 시적할때부터 무척 힘들었는데, 엄격한 품질관리로 조금씩 그 기술을 인정받아 국내 회사들에게 납품할 길이 열리더랍니다.
그리고는 마침내는 일본에 납품할 길까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에 납품하는 것은 품질관리를 특별히 더 엄격하게 하여 납품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75%가 퇴짜를 받았답니다.
그래서 항의를 하러 그 물건을 가지고 당장 일본으로 날아갔답니다.
그런데 색깔이 육안으로는 정확히 맞는것 같아 자신있게 찾아갔는데, 일본 사람들은 현미경을 놓고 보여주며 무엇이 어떻게 틀린가를 기계가 데이타로 보여주더랍니다.
이 일로 인하여 회사는 거의 파산지경에 빠졌는데, 이 기회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정밀한 품질의 휴대전화 케이스 납품회사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 Scotts Valley 에 있는 기도원 원장님도 엄청난 광야의 고초를 겪으신 분이십니다.
돈많은 집으로 시집을 갔고, 일찍 San Fransico 로 이민와서 여유있는 생활을 하였답니다.
교회는 일년에 서너번씩 큰 행사가 있을때에 출석하는 것이 고작이었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편이 돌아가시고 가산이 기울자 어떻게 할수가 없더랍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걸을 힘도 없는데, 하루는 San Fransisco Downtown 근처를 걷는데, 가다보니 공사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공사를 하는가 가까이 가서 보니 지하 깊이 파 내려가더래요.
그것을 보면서, 아하 더 깊게 내려갈수록 건물을 더욱 더 높게 세울수 있겠구나 라는 깨우침이 오면서 마음에 위로가 오더랍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하나님이 김목사님을 광야로 내 모신 거에요. 이제 앞으로 큰 사역을 하시게 될 거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물을 덮어 놓은 것처럼 그대로 견디라고 하신 거에요. 그러니 굳건하게 잘 견디세요. 때가 되면 이제 그 그물을 걷어 주실 것이고, 그러면 아주 큰 사역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이 광야생활을 꾹 참고 하나님의 Season 을 기더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도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지금 제가 아직 준비가 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보내 주셔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아직 안 보내주시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 생명의 강 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 질수 밖에 없고, 자존심을 완전히 버릴수 밖에 없고, 바울 사도처럼 학벌이나 목회경력도 배설물처럼 버릴수 밖에 없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 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길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광야 생활을 통하여 제 마음가운데 있는 세속적인 불순물이 빠져나가는 연단과정을 거쳐 그 분앞에 정금처럼 나아갈때, 제 마음이 좀더 큰 그릇으로 다듬어 질때 하나님께서는 많은 성도들을 보내 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기도원에서 주신 비전과 확신을 가지고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를 시작하였던 것 만큼,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Bay Area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증거되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광야 생활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오직 하나님께서 더욱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특권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척 발버둥치며 괴로워하고 억울해하기도 참 많이 하였지만, 시편 136:16절,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는 말씀처럼 지금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광야 생활을 통하여 저희 부부의 신앙의 깊이가 한단계 더 깊고 높은 단계로 성숙하게 된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에는 물질의 광야도 있고, 사랑의 광야도 있고, 건강의 광야도 있고, 명예에 대한 광야등 수많은 광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 비추어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여러 부분의 광야중에서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의 광야로 내 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그 부분이 나의 신앙생활에 가장 고쳐져야 할 부분이고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기에,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면 내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내 방법대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부분의 광야로 인도하셔서, 나를 부수고 빻아서 다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 안에서 당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지금 광야 생활을 시작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혹은 광야의 한 복판에서 힘들어 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광야 생활을 거의 마치고 지금 모압 평지 쯤에 다달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마시고, 옛날 길로 돌아가지 마시고 이 광야를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 광야 길을 차분하게 통과하십시다.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를 떠나 애굽으로 돌아가다가 광야에서 길잃고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같이 이 놈의 만나만 먹으니 영양실조 걸리겠고, 삶에 낙이없다고 불평하며 애굽으로 되돌아 가다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맛없는 만나를 먹으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끝까지 광야 생활을 이겨낸 사람들 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갈수 있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본문 13절에,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매정하게 광야로 내 쫓았지만, 행여 고통중에 쓰러져 영영히 못 일어날까 우리를 도우라고 천사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때에따라 돕는 은혜로 말미암아 숨도 못쉴만큼 극심한 환난중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웃을수 있는 여유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처한 이 광야 생활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이 광야를 인내하며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맛이없고 매마른 만나만 먹다보니 신앙의 영양실조도 걸리겠고, 너무 힘이 없이 매말라 간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이 만나를 먹은 자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고 급할지라도 불기둥과 구름기등이 움직일때 움직이고 멈출때 멈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다같이 눈을 감고 같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광야를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누릴 가나안의 축복의 정도도 결정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광야 어느 부근에 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선명하게 바라볼수 있는 믿음을 달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광야의 갈증과 질픙에 쓰러지지 않도록, 오아시스와 쉴만한 그늘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우리들을 수종들라 보내주신 천사의 도움으로 이 광야 길을 잘 통과할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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