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06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라
마가복음01:07-08
February 28, 2010
지난주에는 마가가 로마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이것이 유왕겔리온, 복음 즉 좋은 소식이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원래 유왕겔리온이란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단어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황제의 전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왕자가 결혼을 한다든지 혹은 황태자가 태어나는 등 황실에 경사가 났을 때의 소식을 “유왕겔리온” 이라 하였습니다.
이때 황제는 헤럴드, 즉 전령들을 풀어서 유왕겔리온 을 선포하고, 전 국민에게 세금을 감면해주든지 죄수를 풀어주든지 옷감이나 곡물등 선물을 하사하였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황제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최근에 북한 김정일이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전 국민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을 유왕겔리온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유왕겔리온 하면 온 백성들은 황실의 경사의 소식과 함께 황제의 하사품을 기대하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그것이 유왕겔리온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 되신다, 이것이 바로 유왕겔리온, 가장 기쁜 소식이다” 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황제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정말 목숨을 건 획기적인 선포입니다.
하지만 로마가 결국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독교국가가 되면서, 유왕겔리온은 마가가 선포한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전도라는 영어의 단어 Evangelism 이 파생된 것입니다.
극심한 박해 속에서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의 구세주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를 이 환난 속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실까 라는 회의에 빠졌던 로마의 성도들에게, 마가는 이렇게 유왕겔리온, 기쁜 소식을 명쾌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침례요한이 요단강 북쪽, 지금 시리아 바로 아래쪽 아마도 골란 고원근방으로 여겨지는데, 그 쪽에 있던 광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은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며 거기에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백성들을 착취하는 세리들에 너무도 힘들고 지쳐 쓰러지고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이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들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메시아가 오신다는데 그 분께서 언제나 오실까? 속히 오셔서 이 로마 군들을 물리치고 평화의 왕국을 세워주셨으면 좋겠다 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침례 요한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에게 소망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있다” 라는 소문이 들리게 됩니다.
그러자 심령이 너무도 메마르고 갈급했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을 버리고 이 멀고 험한 광야에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멀리서 온갖 고생을 하며 자신을 찾아온 이 사람들을 위로하기는커녕, “회개하라” 고 경고하면서 회개의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7-8절은 요한이 광야에서 향하여 설교한 메시지 내용입니다.
그는 우선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다고 선포합니다.
자신은 오실 그 분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자신보다 능력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두나미스” 라 하여 땅이 갈라지고 지진이 일어나게 하거나, 병든자를 고치는 등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능력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산들을 보십시오.
몇 년 전에는 인디안 선교를 위하여 Grand Canyon West 에 갔었는데,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저 높은 절벽 위에서 빨간 흙탕물이 급하게 흘러내리는 강을 내려다 보는데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창조과학자들은 이것이 최초 지구 모습이라고, 하나님의 창조가 아직도 계속되는 증거라고 하는데, 이것이 최초 지구모습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해이티 지진 사태를 보십시오.
아무리 현대 과학이 발달하였다고 하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 앞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아직도 계속 팽창하는 우주, 그 끝없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누가 감히 도전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또 하나의 능력은 “Authority, 권세” 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임재하심과 말씀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80세된 아버님이 30살된 아들에게 이리오라 하면, “예” 하고 갑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어떻게 감히 거역할 수 있습니까?
이 아들이 아버지보다 힘이 없어서 복종합니까?
80먹은 노인의 힘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권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8: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거라사 지방에 가시니까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라고 합니다.
귀신들은 인간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의 권세에 벌벌 떨며 이렇게 부르짖은 것입니다.
이처럼 침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의 힘과 그 권세에 비할 때에 자신은 그 분의 종처럼 그 분 앞에 엎드려 그분의 신의 끈을 풀고 매어드리기에도 부족한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침례 요한은 지금 인기 절정에 있는 상태입니다.
원근 각지에서 그를 보려고 그 험한 곳에까지 목숨을 걸고 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날마다 엄청나게 늘어만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하게,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다.
그 분은 어찌나 고귀하시고 능력이 많으신지,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묶고 푸는 일 감당하기도 부족한 존재라면서, 자신과 그분과의 관계를 확실히 합니다.
누구나 겸손의 자리에 있는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조금 되는 것 같으면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우리 본능입니다.
더구나, 본인은 잠잠하고 싶은데 주변 사람들이 아첨하며 부추겨 세웁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져있다가, 조금 잘못되면 아첨꾼들도 떠나고 걱정 근심만 남게 되어 혼자 우울해집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이며 주변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런 우리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며 살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소유물도 모두 하나님 것이요, 나의 가정도 자녀들도 그리고 나의 생명도 하나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날마다 있어야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교만이 기를 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침례 요한은 바로 그 자리, 자기의 자리, 자기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았습니다.
침례요한처럼 항상 겸손한 자리에서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침례요한의 그 다음 멧세지는, 나는 너희에게 회개의 물침례를 주었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침례라 불침례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성경에 성령침례다 불침례다 라는 말은 없습니다.
Baptized by Holy Spirit, Baptized by Holy Spirit and Fire,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 라는 표현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Baptized by Holy Spirit,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이 문제를 너무 신비하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 특권층 만의 것인양 너무 신비주의로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언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가 의 시기 문제와, 또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의 행위나 현상에 대하여 논란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침례요한이 베푼 물로 침례를 받는 것과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 혹은 성령의 불로 침례를 받는다 라는 이렇게 두가지 종류가 소개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28.18-20절에서 명령하신,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가서 내 제자를 삼아 침례를 주고 내가 네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고 하셨고, 또한 마가복음 16.15-6절에,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 이라고 한
것은 회개와 새 생명을 얻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거나 불로 침례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고만 하셨을 뿐 실제로 행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5절에, 승천직전에 성령강림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시면서,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말씀하여 성령강림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 결국 동시에 일어나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였듯이 성령을 받는다는 것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 것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드리면, 그리하여 구원의 확신이 일어난다면 그때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요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혹은 기도하다가, 혹은 찬송을 부르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오고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것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으면, 그 사람은 이미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안에 성령님이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Pentecostal Church, 특히 “Assembly of God(하나님의 성회)” 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 다음 단계로 성령의 침례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것의 표적으로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방언을 권장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과 방언을 받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의 성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이 목사님의 가르침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이 목사님이 미국으로 선교사로 오셔서 선교를 하시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당장 교회 직분 자로 임명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압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은 자에 한하여 어느 정도 Probation 기간을 주었다가 직분을 맡겼습니다.
그 오랜 후에 미국땅에 감리교와 침례교가 크게 성장하는데, George Whitfield 라는 그 당시 획기적인 부흥강사 이후, 신학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부흥강사들이 여기저기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납니다.
그러자 영국의 감리교는 이러한 식 부흥집회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억제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부흥운동에 가담했던 감리교단 목회자들과 침례교단 목회자들이 1905년 Springfield, Il 에 모여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는데 그것이 바로 Assembly of God, 하나님의 성회 입니다.
그리하여 이 교단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이의 그 두단계를 발전시켜, 두 단계의 축복(The First Blessing and Second Blessing)이라 해서, 첫번째 축복은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두번째 축복은 성령을 받아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며, 그 증거로 방언을 말하게 된다는 교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사도행전에서 찾습니다:
1.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에 갔을 때 – 베드로를 초청하여 기도를 받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2. 베드로가 고넬리우스 집에 갔을 때 – 베드로가 기도하자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였다.
3.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 너희가 성령에 대하여 아느냐 하니 요한의 침례밖에는 알지 못한다고한다. 그래서 바울이 기도하니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더라.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서의 말씀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하여, “누가는 외부적으로 일어난 현상을 기록한 것이지 실제 내부에서 역사하시던 성령님에 대한 것은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과 동시에 성령도 받는 것이다.” 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Neo-Pentecostals” 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과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면 성령 충만함을 입기 때문에 결국 같은 현상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보십시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됩니다.
고린도 전서 12:13절에,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하였듯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하시는 근본 목적은 온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침례를 받았으면,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차별을 두려고 하지 않고, 한 형제요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방언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 수 낮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또 따따 하는 방언을 애기방언이라고 하면서, 말로 하는 방언이 더 우월한 것처럼 차이를 두려고 합니다.
이것은 방금 고린도 전서 12:13절, “한 성령으로 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라고 하신 말씀처럼, 진실로 성령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하는 행위가 아니요, 그렇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둘째,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나가서 전도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 성도들, 로마인들에게 붙잡혀 죽을까 두려워 다락방에 올라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10일 후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고, 각기 다른 방언, 여기서는 Speaking in Tung 이 아니라, 각기 다른 나라말로 이야기를 해도 한 성령 안에 있었기 때문에 다 알아듣게 됩니다.
즉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즉시 밖으로 나가서 전도하게 됩니다.
체포되어 죽지는 않을까 라는 두려움에서, 이제는 목숨을 걸고 전도를 하는 전도자들로 변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할 마음이 없으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 영혼에 대한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내 안에 성령님이 게시는 가, 과연 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더 기도하고 싶고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되면, 그 전보다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늘 기도하고 싶고 틈나는 대로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고 싶어집니다.
한 때 대중가요나 기타 다른 음악에 빠졌다가도 이제는 찬양이 더욱 재미있고, 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가슴이 뭉클해 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성령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도덕적인 문제 윤리적인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그만 거짓말에도 양심이 찔립니다.
물질적인 면에서도 하나님 것과 내 것에 대하여 정직해집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속마음과 생각까지도 다 아시며 감찰하시는 것을 알고, 이제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게 됩니다.
다섯째,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자들에게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자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이재하심, Anointing 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됩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아픈 상처가 치유되며 절망가운데 있던 자들이 소망을 갖게 되는 눈에 띄는 이적들이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의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 필요했을 까요?
엄청난 박해 속에서 그들이 믿음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요?
성령으로 침례를 받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그 분의 이재하심을 항상 체험하며 살지 않으면 어떻게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의 성도들은 성령의 침례를 받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일 듯 일어섰던 그 성도들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순교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처형 순간에도 기쁨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같이 죽어가는 동료들과 “저 천국에서 만나자” 며 기쁨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침례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믿음의 행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까?
방언을 말하고, 울고 불고 하는 것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증거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셨다고 한다면, 다음의 현상이 나의 삶 가운데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1.항상 주님 안에서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삽니다.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심 그 한가지로도 만족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닥치는 환난이나 고난에도 두려워 하지않고 담대해집니다.
2.내 뜻과 내 주장으로 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십니까?
3.그리스도 안에서 물질관이 바로 서게 되며, 말과 행실이 투명해집니다.
4.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전도와 선교등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삽니다.
5.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봉사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주님 앞에 나의 마음과 생각을 다 내 보이시며, 과연 나에게는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중에 몇 가지나 있는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격증을 따듯 어느 한 순간의 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체험, 즉 성령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성전 되시는 언제 고갈될지 모르며, 언제 사단의 유혹이나 시험 그리고 공격에 넘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는 여러분, 항상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참 증인의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