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Posted by on Feb 23 2010 at 05:52 pm

마가복음 01:01-01절

Feburary 14/2010

 

마가복음은 서기 70년경 로마의 어느 시골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는 로마 황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핍박이 아주 심했을 때입니다.
특별히 64년경부터 네로 황제는 발작적으로 크리스천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핍박은 심해지고 그로 인하여 순교하는 성도들은 늘어만 갔습니다.
극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로마의 성도들은 카타콤부라는 동굴속에 모여 주님께서 속히 오셔서 네로황제를 심판하시고 믿는자들에게 면류관을 주시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침묵하셨고, 핍박은 멈추기는커녕 날로 더 드세져 갑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베드로 사도는 로마에서 체포되어 십자가 형으로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옥생활을 하시던 바울사도는 로마 시민권자이었기 때문에 십자가 형이 아닌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할지라도 베드로 사도나 바울사도만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 분 들마져도 이렇게 무참하게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그 분들이 순교를 당하면 세상이 금방 뒤집히고 황제가 중병에 들던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든지, 무엇인가 큰 이변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태양은 오늘도 동에서 떠서 서로 집니다.
이러한 암울하고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로마의 성도들은 다음의 생각들에 빠져 고민하고 방황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정녕 우리를 버리셨는가?
로마에 있던 유대교인들은 유대교가 탄압의 대상에서 제외된 특권을 계속해서 누리기 위하여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기독교를 탄압합니다.
기록에 보면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할 때 이 유대교인들이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유대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치광이요 하나님을 경멸하는 신성 모독죄에 빠진자들이라며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핍박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며, 유대교로 전향 오도록 권하면서, 듣지 않으면 로마에 밀고하겠노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특히 유대교에서 온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라며 예수님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다시 전향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급기야 유대교의 제사야 말로 완벽하지 못한 인간 제사장들이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제사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은 평생을 날마다 제사를 드리지 않느냐.
우리의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은 아무런 흠이 없으신 완전하신 제사장이요, 또한 그 완전하신 분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서 완전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이상의 제사가 필요없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고가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예배드리고 그분께 헌물을 드리는 것이다 라며 반박하는 편지를 각 교회마다 보내는데 이 편지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없으신가?
로마 황제의 숭배는 당연히 우상 숭배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처형시키는 것은 당연히 사악한 짓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던 역대 로마 황제들은 사단에게 쓰임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크리스천들이 쓰러져 갔고, 현재 남아있는 크리스천들도 불안과 공포속에 나날을 살고 있는데, 왜 주님은 오시지 않는가?
왜 주님은 우리를 이 환난에서 속히 구원해 주시지 않는가?
정말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없으신가?
예수님도 다른 우상 들이나 마찬가지로 무능하단 말인가?

셋째, 교회에서 빠져나와 그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너무도 위험하고 자칫하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니까, 우선 당분간은 예수 안믿는 사람들처럼 살다가, 상황이 좀더 나아지면 다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곧 무너지고 다시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넷째, 앞으로 몇일 아니 몇달안에 꼭 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시겠지.
마태복음 25장의 미련한 다섯신부처럼, 늦어도 언제까지는 오시겠지 라며 시한부적인 종말론적 신앙에 빠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해가 생각보다 오래 가면서 이러한 신앙은 상처와 실망만 안은채 무너져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데살로니카 사람들 중에 종말이 곧 오는데 무엇하러 일은 하느냐면서 이집 저집 찾아가 폐를 끼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데살로니카 후서 3:10절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하라” 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곧 다시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하되 그 날만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말고, 모든 일을 정상적으로 열심히 하면서 기다리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다섯째, 순교가 두려워 숨어서 두려움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믿지 않을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병사들에게 발각되면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에 숨어서만 신앙을 지킵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그들은 지쳐버리고 신앙은 퇴색해져가게 되어버렸습니다.

6. 현실의 불안하고 암울한 상황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교회를 지키며 계속해서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곧 오실 주님, 그리고 그 심판을 기다리며 신앙의 절개를 지켜 나갔습니다. 오늘 당장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더 좋은 나라로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더 큰 영광과 상급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교회 내에서 여러 부류의 교인들이 서로의 신앙의 갈등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매우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황, 불확실한 미래앞에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이 시기에 위의 모든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가장 절실하게 찾아오는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였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내가 만난 그분, 내가 믿는 그분이 진정으로 Son of God,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인가?
그분이 과연 우리의 구세주 되신단 말인가?
만일 그러한 확신만 있다면 그들은 목숨까지도 버리면서 주님을 따를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면서 그 믿음까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마가가 로마에 있는 로마의 교인들을 모아놓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시다” 라며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는 베드로로부터 들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또한 체험한 것을 토대로 주관적이 아니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 합니다.

그날 마가를 통하여서 주신 기쁜 소식, 이것이 바로 오늘부터 같이 묵상하고 그간 식었던 신앙을 되찾아 핍박의 칼날을 피로서 맞섰던 믿음의 선진들이 체험한 은혜와 용기를 받고자 하는 마가복음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엄청난 시련과 고난중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마가는 그 첫 마디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즉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여태까지 믿었던 그 믿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환난중에 있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겠습니까?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저 영원한 천국의 소유자임을 확신하며 주님을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주저함 없이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순교하는 그 마지막 순간, 고통과 공포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 천국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맞이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믿을 수만 있다면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우리들도 저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두려움 없이 그 날이, 축복의 그 날이 올 때까지 능히 믿음을 지켜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가는 이어서, “복음의 시작”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복음이라 번역된 헬라어 “유왕겔리온” 은 “Good News, 좋은 소식, 기쁜 소식” 입니다.
그리고 “유왕겔리온” 은 고대 도시국가시대에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기쁜 소식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사무엘 하 18:1절 이하를 보면, 다윗의 병사들이 압살롬의 병사들을 만나 싸울때 다윗은 집에서 전장에서 소식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한편 압살롬을 살해하고 전쟁에 승리하자 요압은 나팔을 불고, 집에서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는 다윗에게 승전소식을 전하라고 전령을 보냅니다.
그 전령을 “헤럴드” 라고 하고, 그 전령이 가지고 온 기쁜 소식,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가 바로 기쁜소식 “유왕겔리온” 입니다.

그런가 하면 B.C490 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사신을 보내 페르시아에 무조건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 같은 페르시아의 항복요구에 그리스는 거부하며 사신을 우물 속에 넣고 매장시켜버렸다고 합니다.
이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는 배 600여척을 동원하여 병사 10만 여명을 파병하여 그리스 정벌에 나섰습니다.

조그만 도시국가 아테네가 이 많고 강한 병력을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은 아테네는 지략이 뛰어난 용장 “밀티아데스” 장군 지휘하에 불과 1만명의 기갑병으로 페르시아 원정군을 향하여 출격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아테네 동북방 42.195Km지점에 있던 마라톤 평원에서 양군이 만나게 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싸웠던 아테네 병사들은 페르시아 강군을 물리칩니다.
완전히 패하여 멸망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던 그들에게 이 승리는 너무도 흥분하게 하였습니다.
너무도 좋은 이 기쁜 소식, 유왕겔리온을 전하기 위해 전령 “필리피데스” 는 마라톤 평원에서 약 42.195Km의 거리를 쉬지 않고 단숨에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는 수만의 아테네 시민에 둘러싸인 가운데 “우리 아테네가 승리했습니다” 이 한마디를 전하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처럼 유왕겔리온은 생사가 달린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승전 소식이 전쟁에서 이긴 백성에게는 더 없이 기쁜 소식, 복음이지만, 전쟁에서 진 백성들에게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할 절망이요, 엄청나게 큰 고통의 임박함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이 전쟁에서 진 페르시아의 핏줄을 이은 오늘날 이란 사람들은 마라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단어였었는데, 나중에는 황제의 탄생이나 대관식 소식 등 황실에 큰 경사가 났을 때, 혹은 국가적인 큰 경사가 났을 때에도 그 소식을 “유왕겔리온” 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황제의 전용어가 되었으며, 황실에 경사가 났을 경우 황제는 백성들에게 “유왕겔리온” 을 선포하면서 특별 선물을 하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왕겔리온” 이 선포되면, 백성들은 황제의 하사품에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이처럼 유왕겔리온은 단순한 기쁜 소식이 아니라, 선물이 따르는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황제가 독점하여 사용하던 이 “유왕겔리온” 을 바울사도는 담대하게 “예수가 곧 그리스도다” 이것이 “유왕겔리온이다” 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가 역시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포로 마가복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난후, “유왕겔리온” 은 더이상 황제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요 결국 교회의 용어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어두움에, 불안감에, 절망에 빠져있던 로마의 성도들에게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가 바로 승전소식,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시요, 지금 우리를 학대하고 있는 저 로마도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구출하여 당신의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오늘 “예수님이 이미 사단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셨다” 는 이 기쁜 소식을 너희들에게 전하노라 라고 마가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결단의 시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쁜 소식, 나쁜 소식, 슬픈 소식등 여러가지 소식들을 듣게 됩니다.
NEWS 가 무엇입니까?
North East West South 에서 오는 소식들입니다.
그런데 동서남북에서 오는 소식들은 온통 비리와 비극과 수치와 절망과 아픔과 분노를 일으키는 소식들입니다.

그렇다면 기쁜 소식 중 여러분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 유왕겔리온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소식은 무엇입니까?
가장 사랑하는 소식은 무엇입니까?
나의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소식은 무엇입니까?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의사로부터 오는 소식입니까?
직장에서의 승진 소식입니까?
사업이 엄청나게 잘 된다는 소식입니까?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합격되었다는 소식입니까?

물론 의사로부터, 직장으로부터, 학교로부터 오는 소식들도 좋은 소식 기쁜 소식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 유왕겔리온이 되어야 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곧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곧 나의 구세주입니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실의에 빠진 로마의 성도들은 이 소식이 바로 그들이 지금까지 들어본 소식 중 가장 기쁜 소식, 유왕겔리온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 분들은 감격하였고 눈물을 흘리며 흥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우리의 구세주이신가? 라는 회의적인 신앙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이요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시다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에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순교를 각오한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 당시 로마의 성도들처럼 갈급하게 주님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분들처럼 저 천국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그 분들처럼 식어졌던 믿음이 되 살아나게 될 것이요, 마침내는 목숨까지도 내 놓을 수 있는 믿음의 용사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리도 전서 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한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사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시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로마의 성도들처럼 이 기쁜 소식으로 위로 받고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소식으로 말미암아 앞날에 대한 밝은 비전으로 들뜨고 흥분된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