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3
광야에서 일어난 부흥회
마가복음 01:02-06절
February 20/2010
지난 주에 보신 바와 같이 로마에 있던 크리스천들은 극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깊은 실의에 빠집니다.
그간 베드로로 부터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소경의 눈을 뜨게하신 기적, 문둥병자를 고치신 기적,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에 대하여 설교를 생생하게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할수있는 이적,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베드로를 통하여 확인받은 것입니다.
바울사도로 부터는 다메섹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 만삭되지 못한 칠삭동이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 루스드라에서 앉증뱅이가 일어난 이적, 돌에맞아 죽었다가 살아난 이적, 삼층천 하늘에 갔었던 체험, 로마로 압송되어 올 때 유라굴라 라는 폭풍을 만나 배가 파선할때 일어난 이적등에 대한 설교를 들어왔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십자가에서 순교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셔 살아계신다는 증거요 주님의 특별하신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이처럼 로마의 성도들은 베드로로부터는 주님과 함께 살면서 체험한 현실적인 신앙, 바울사도로 부터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역한 부활신앙을 본받아 확신위에 섰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네로황제가 서기 64년 경에 들어서면서 발작적으로 크리스천들을 박해합니다.
그러한 무렵에 베드로 사도가 체포되어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체포되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구원해 주실 줄 알았는데, 끝내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어갑니다.
그 얼마후 바울사도의 재판이 있었는데, 박해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변론해줄 사람들이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사도 역시도 무참하게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극심한 공포와 불안과 혼란에 빠진 로마의 성도들,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 분이 과연 우리의 구세주냐” 라는 회의에 빠져 가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로마에 있던 유대교인들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기독교의 불완전성을 비판하며 그 당시 박해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유대교로 전향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로마인들에게 고소하겠노라고 협박과 설득을 합니다.
그리하여 불안과 공포에 질려 유대교로 전향하는 성도들과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그때 평생 베드로 사도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어왔던 마가가 나서서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은 과연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 되심,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기쁜소식, 복음입니다” 라고 간증을 시작하였습니다.
마가의 이 간증이 바로 마가복음이라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시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라고 전한 마가는 바로 이어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라며 듣는 자들을 광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침례요한을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시는 분으로 소개하면서, 침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하여 듣는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금 광야에서 침례요한의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있는 것처럼 상상하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광야는 어떤 곳이며, 왜 로마의 성도들을 광야로 초대하고 있을 까요?
광야는 완전한 사막은 아니지만,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땅이 건조하고 마실 물조차 구하기 힘들만큼 살기 힘든 곳입니다.
비가 오는 우기에는 초목들이 잠깐 자라다가 건기가 되면 일순간에 다 말라버리고 사막처럼 되어 버리는 곳이 광야입니다.
또한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공기가 무척 건조합니다.
그래서 한 낮에는 태양볕이 그대로 내려쬐게 되기 때문에 뜨겁지만 해가지면 춥고 드센 바람이 불어 굴속이나 움막에 들어가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는 농사를 지을수도 없고, 가축을 기르기에도 적합하지 않고, 오직 하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먹여주시고 인도하시는대로만 살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집을 짓고 정착해서 사는 곳이 아니라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위하여, 더 좋은 삶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정확하게는 약 38년 6개월 동안 광야생활을 하였는데, 그들이 이 길고 긴 광야생활에서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것.
그간은 땅을 바라보며 땅에서 나는 것을 바라보고 땅에서 나는 것을 거두워 먹고 살았는데, 광야에서는 돌멩이와 모래뿐 땅에서는 아무것도 나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받아먹고 살게 된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하늘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이 한가지, 정말 간단한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것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이 한가지를 터득하고 이러한 삶을 살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무려 40년동안이나 끌고 다니신 것입니다.
한편, 굶주리고 헐벗으며 로마의 병정들에 붙잡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주님의 보호와 도움이 아니면 한시도 마음놓고 살수 없는 상황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그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광야” 라는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그들은 “광야” 를 상상하며 자신들의 삶이 바로 광야생활과 같음을, 오직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바 없는 자신들의 현실을 바라보며, 광야에 놓여있는 것과 같은 자신들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에 침례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고 설교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광야, 즉 거친 들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침례요한, 좋은 옷이 없었기 때문에 온 몸에 낙타가죽을 두르고 얼굴은 온통 털로 뒤덮혀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두 눈은 샛별처럼 빛났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메뚜기를 잡아먹고 석청, 즉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살던 땅벌들의 꿀을 따서먹고 살았던 그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설교를 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침례요한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예루살렘이 아닌, 사람들이 살수없는 광야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곳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머물던 광야가 아니라, 요단강 북쪽 시리아 쪽의 광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려면 거리상으로나 교통편을 보면 보통 결단 가지고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멀고 힘든 곳입니다.
여리고를 통하여 요단강변도로를 타고 북쪽 시리아 쪽으로 죽 올라 왔을 텐데, 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왔을 텐데 아마도 최소한 이틀씩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면서 중간 어디 노중에서 야영을 해야했을 것이며, 또한 마실 물과 먹을 것도 충분히 준비해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침례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가려면 경비도 경비지만 건강한 사람들도 보통 각오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모험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 요한은 왜 이 광야에서 사역을 하였을까요?
광야는 인생의 훈련의 장이요, 신비의 장소입니다.
세상문명과 차단된 광야는 인간적인 욕망과 세속적인 향락이 정지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 자연이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나 있는 신성과 거룩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또한 순하고 약한 짐승은 살수없고 오직 거칠고 사나운 짐승이 험하고 메마른 바위틈과 굴속에서 사는 곳이요, 그러기에 두렵고, 외로운 곳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고난과 두려움과 신비가 얽혀있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광야로 나아가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서 입니다.
모세는 시내산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민족 구원을 위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유다남부 광야에서 고난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면서 거친 광야에서 너무도 괴롭고 무섭고 고통스러워 하늘을 향하여 “주여 어느때 까지니이까? 주여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돌리지 마옵소서” 외마디처럼 외치면서, 정금같이 연단되어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성군으로 다듬어져 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라는 야심찬 청년도, 밝은 대낮에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을 듣고 눈이 안보여 두려움과 고통속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당장에 전도하러 나갔다가, 전도는 커녕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하자 아라비아 광야로 도망쳐 거기서 3년을 헤메였습니다.
그리고는 야심찬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바울사도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고 자기 백성을 환난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형제들로부터 팔리움을 당하고 보디발의 노예생활과 이집트의 감옥이라는 끔찍한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감당시키기 전에 우리를 광야로 내몹니다.
그리고 거기서 세상의 모든 직위나 재물이나 명예를 다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세에서 주님을 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광야에 내 몰린 우리들, 아무도 아무곳도 의지하고 불평하고 호소할곳 없어서, 하는수 없이 하늘을 향하여 고통을 호소하고 하늘을 향하여 아픔과 억울함을 호소하고,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처럼 상처받고 쓰러져 신음할 때 주님은 손수 포도주와 기름을 가지고 오셔서 상처를 씻어 주시고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에 내몰려 지치고 쓰러져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주님께 내 맡길때, 주님은 오셔서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변에서 보면 광야에서의 고난과 고통이 크고 깊으면 깊을수록 그 사람의 기름부음(Anointing) 의 정도도 더욱 크고 강한 것을 봅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욥기에 기름부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욥이 받은 고난이 가장 극심했다는 의미요, 고난중에 기름부음을 그만큼 많이 받게 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주변의 목회자나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분들을 보십시오.
믈론 처음부터 드러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고난을 깊게 겪으신 분들, 광야생활을 더욱 더 철저히 하신 분들이 기름부으심이 더욱 강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도 지금 광야생활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어 원망하며 주저앉고 싶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지만, 더욱 강하고 깊은 기름부으심을 기다리며 오늘도 소망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또한 이 고난 뒤에 오는 축복을 미리 보았기 때문에, 그 은혜와 축복을 포기할수 없어 그 때를 기다리며 오늘도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실이 자꾸만 힘들게하고 여러분들을 실망시키고 좌절시키고 주저앉게 만듭니까?
그 고난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그 고난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예수님께 눈을 돌리시 바랍니다.
고난을 변장된 축복이라고 부르는 분도 있지만, 고난 자체가 축복이 될수는 없습니다.
애굽을 나와서 광야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 허다한 사람들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다가 광야의 모래에 묻혀버린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게 닥쳐온 고난이, 내게 펼쳐진 광야생활이 나를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게 할 수도 있지만 그 광야에서 넘어져 묻혀 버릴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붙잡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선 자에 한해서만 고난이 축복으로 변하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물론 고난중에도 항상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지치고 힘들어, 상처받고 넘어진 때에만 주님의 손을 붙잡지 마시고 주님과 나란히 걸을 때에도 주님의 손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나라 들어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주님 붙잡은 그 손을 놓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 사람들, 로마의 학정하에 소망이 끊기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겠다 하고 광야로 나왔던 것입니다.
날마다 짐승을 잡아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회당과 성전이 있었지만, 그곳 제사장들로부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침례요한이 요단강 북쪽 광야에서 말씀을 선포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본문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라고 하였는데,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존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간 오랜 광야생활속에서 연단되어 아픔과 억울함과 분노등 마음속에있던 모든 불순물들이 빠져나가고 오직 정금처럼 되어, 자신은 사라지고 그의 생각이나 삶에 오직 하나님의 흔적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투명하여, 자신의 성격이나 생각이나 특성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형상만이 그에게 나타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오직 주님의 음성, 그가 하는 말이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된 상태인 것입니다.
찬송가 204장에,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라고 하였는데, 이 찬송가 작가도 이러한 체험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말씀을 듣는자들은 그의 생각이 아니요 자신이 연구한 바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침례요한이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가운데 압도되어 살아계신 하나님과 Encounter, 면전에서 만나는 체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Encounter 를 지금까지 두번 체험하였는데, 한번은 2008년 2월에 집에서 그리고 다른 한번은 2009년 1월에 기도원에서 체험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시는데, 제가 공중에 붕 뜨게되고, 이 세상은 간곳없고 다른 세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주님의 어루만져주심, 이 체험이 있었기에 억울함도 고난도 이겨낼수 있었고, 앞으로 남은 고난도 능히 이겨낼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의 강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체험을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욥처럼, “내가 말로만 듣던 준미을 이제는 제 눈으로 뵙니이다” 라는 고백을 하실수 있으시기를 가도드립니다.
단순히 예수믿고 구원받아라가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할 테니 당신도 만나기를 바랍니다 라는 식으로 전도하고 간증하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던 그들, 헐벗고 굶주리던 그들에게 이 광야길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씀을 듣고자 이 험한 길을 목숨을 걸고 찾아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따뜻한 잠자리를 박차고 거친 황무지를 찾아나오는 이 모습,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을 둘수 없어,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 생상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을 면전에서 뵙기위해 이 멀리까지 나아오는 모습을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멀고 험한 여행길에 지치고 헐벗어 비틀거리며 찾아온 그들을 향하여 침례요한은 “여러분들, 먼 예루살렘에서 이곳까지 잘 오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 죄를 회개하라 그리고 침례를 받음으로써 너희 죄를 씻음받아라” 고 합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라” 는 책망입니다.
그들이 생각할때, 정작 회개할 사람들은 로마인들과 로마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유대인 매국노들, 그리고 세금을 착취하는 세리들인데, 그래도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그 먼길을 고생고생 하면서 힘들게 찾아왔는데, 칭찬은커녕 기껏 하는 소리가 “회개하라” 입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런 교회 다니고 싶겠습니까?
저가 안수기도라도 해 주든지 축복기도라도 해 주면서,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너희를 지키시리라 라는 등의 예언의 말씀을 주시든지 할 것이지,
지치고 굶주려 다 죽게 생긴 사람들에게 기껏 한다는 소리가 “회개하라?” 내가 기껏 이 말을 들으러 여기까지 만사제쳐놓고 이 먼 길을 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신비하고 오묘한 말씀, 기적을 일으키는 말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는 말씀을 들으로 왔지 그 까짓 책망의 소리를 들으려 온줄 아십니까?” 라며 불평과 불만을 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멘” 하며 기꺼이 요단강으로 따라나와 회개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일반 인들은 물론 군인들과 세리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백성들을 지도하며 성경을 가르치던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평생동안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쳐왔지만, 아직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성경학자요 제사장급들이었던 바리새인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란 방향을 인생 길을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회개는 구체적으로 네 가지 단계의 행동을 통해 일어납니다.
먼저 자기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데 어떻게 회개를 합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으면, 이제는 그 죄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잘못하였습니다,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그 죄를 고백하고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고백한 것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입술로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으로 회개는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듯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한순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왜 회개가 예수님을 위한 지름길을 내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교만하고 단단한 마음이 아니라, 부서지고 회개한 심령에 들어 오시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더러운 마음, 악한 마음, 음란한 마음, 교만한 마음, 투명하지 않은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실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쉽게 빨리 받아드릴수 있도록, 침례요한을 먼저 보내셔서 그 일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 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군인들, 머슴들, 종들, 선생, 경찰, 정치인들, 국회의원, 장관, 군수, 면장, 부자 가난한자 모두들 나와서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침례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침례요한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인줄 알고 그를 따라다닙니다.
그를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 큰 떼를 이루게 됩니다.
거기에는 제사장등 유대사회의 거물급들도 있습니다.
그때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허리를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침례 요한은 이미 오실 메시아처럼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지않는 광야에 있었지만, 그를 보려고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실 메시아의 신발을 풀어드릴 존재도 못되는 부족한 자다” 라며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정상에 있다고 생각될때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자신은 겸손하려고 하여도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아니합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부추기고, 그 덕에 자신도 무엇인가 한자리 하거나 무슨 이득을 취하려고 그 앞에서 아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들어가서 마침내는 비참하게 추락하게 되는 것을 주변에서 너무 자주 목격합니다.
겸손의 자리에 있는다고 하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침례 요한은 바로 그 자리, 자기의 설 자리도 알았고, 사명의 자리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임지를 보니까 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물론 장소만 조금 다를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로마의 성도들과 상황은 비슷합니다
불안과 공포에 떨던 그분들은 마가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 되십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반듯이 겨쳐야 할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을 통하여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광야로 나왔던 유대인들을 생각하며, 지금 광야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들도 힘을 얻으십시오.
그분들처럼 회개의 침례를 받으시고,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얻으십시오.”
불안에 떨던 로마의 성도들은 마가를 통하여 선포된 이 말씀을 듣고 힘을 얻고 새생명을 얻어 마침내는 목숨까지 내놓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로마의 성도들을 변화시킨 이 말씀, 소망이 끊기고 불안과 공포에 떨던 그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고, 새 소망을 가지고 생명을 다바쳐 믿음을 지키게 하신 이 말씀,
우리도 그 분들처럼 갈급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는다면 오늘 우리도 그분들처럼 예수님 안에서 힘을 얻어 이 광야생활을 기쁨으로 이겨낼수 있을 것입니다.
저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며,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나를 맞이하로 오실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