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01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라
누가복음 10: 30-37절
오늘 본문은 “착한 사마리아사람” 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만큼 널리 잘 알려졌고 여러분들도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아마 이 본문을 주제로 한 설교도 여러번 들으셨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대한 선입견도 가지고 계실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입견을 잠시 뒤로 하시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 고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아주 큰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대 제사장이 있는 곳입니다.
매일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매일 기도와 말씀공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예루살렘 있었다는 것은, 그는 이 크고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면서 영적으로 살찌웠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오늘날로 말한다면 성경에 대하여도 많이 알고 있었고, 매 주 예배를 기쁘고 즐겁게 드렸으며 크리스천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이 아닌 여리고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여리고는 사막 가운데 위치하고 있지만 큰 샘물이 있고 종려나무 숲이 있으며 옆으로는 요단강이 흘러 일찍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여리고는 영적으로는 영적 전투장입니다.
광야생활을 마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통과하여야 했던 관문이 바로 여리고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 모여서, 애굽에서의 종살이에 대한 모든 상처를 씻어내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의미로 Pass Over(유월절) 을 지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애굽의 Bondage 를 끊고 길갈에서 거듭난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난공불락의 요새지 여리고 성을 공격하려고 여호수아는 병사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그 앞에 나타나, 그가 지시하는대로 여리고 성을 돌기 시작합니다.
첫날은 한바퀴, 둘째날도 한바퀴, 이렇게 여섯째 날까지 한바퀴씩 돌고 옵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앞장서 나팔을 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들 입을 꼭 다물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60만 대군이 여리고 성을 돌게 되는데,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왜 입을 다물라고 하였겠습니까?
그들이 여리고 성을 뱅뱅 돌때 여리고 병사들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겠습니까?
성벽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성 위에서 돌맹이를 던지며 겁을 주고 야유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을 연다면 무슨 말이 나오겠습니까?
도대체 이렇게 해서 어쩌자는 거야 이거 정말 미친 짓이야 라고하는 불평 불만, 그리고 이러다가 저들이 갑작스럽게 쳐들어 오면 우리는 다 죽는것 아냐? 하는 Depress 되는 말만 나오기 마련이었기에 입을 꼭 다물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째 되던날 일곱 바퀴를 돌면서 일제히 “와” 함성을 지르자 난공불락의 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칼날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지시하는대로 성 주위를 돌다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성을 지르자 그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처럼 기도의 힘으로 무너진 여리고는 영적 전투장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30절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 는 것은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살찌운 사람이 세상의 영적 전투장을 향하여 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습니까?
베드로 전서 5: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하였듯이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 가기 위하여 마귀들이 틈만 노리고 있습니다.
마귀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마귀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내 아내, 내 남편, 내 친구등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총동시켜 내 믿음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부싸움을 할 때나, 친한 친구가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줄 때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화를 내고 싸움을 하고 번목을 하고 갈라서게 되기를 마귀는 부추기는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마다 9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의 그가 세상도 이처럼 영적전투가 심한데, 그 중에서도 지금 영적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있는 곳으로 갔으니 강도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간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은혜 받은 자가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주님과 같이 있기를 원합니다.
찬송가 499장에도,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자들은 예루살렘에, 항상 교회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양이 풀을 열심히 잘 먹으면 살이찌고 젖이 불고 털이 잘 자랍니다.
그러면 젖을 짜내야 하고 털을 깍아내야 합니다.
젖을 짜내지 않으면 젖이 아프고 병이 생깁니다.
털을 깍아 주지 않으면, 긴 털이 꼬부라져 살을 찌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젖이 분 양의 젖을 짜고 털이 긴 양의 털을 깎듯, 영의 양식을 먹고 살이 쪘으면 세상에 나가서 나누어 주고 뿌려야 합니다.
세상으로 가서 빼앗기기 전에 먼저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즉 교회 생활을 충실히 하면서 은혜를 받았으면 세상을 향하여베풀어야 하고, 전도도 해야되고 선교도 해야 됩니다.
여기서의 세상은 꼭 선교지나 아니면 시장통 길거리등 전도지역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 직장 등등도 포함됩니다.
전도나 선교 그리고 구제를 하지 않으면 교회가 살만 찌게 되므로 교회도 교인들도 영적으로 더욱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액수에 구애받지 마시고, 힘 닿는대로 구제도 하고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리고라는 영적 전투장으로 나간 그는 강도를, 즉 마귀를 대항해서 무찌를수 있는 영적 무기, 기름부음이 없거나 너무 약했습니다.
그렇다면 Anointing, 즉 기름부음을 받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렵고 복잡하고 거창하고 신비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양이나 소등의 짐승을 치노라면 파리떼 모기떼 등이 몰려들어 피를 빨아 먹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쫓아주지 않으면 그 곳이 헐고 피가나며,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심하면 병들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파리나 모기들이 달려들지 못하고, 또한 상처가 아물고 낫도록 기름을 발라 줍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을 받다 라는 의미의 Anointing 의 원래의 의미는 하나님의 보호와 치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에 왕제도가 생깁니다.
그러면서 왕으로 세움을 받을때 짐승의 뿔에 기름을 담아 그 사람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도 의미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받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사울도 왕이 되기 전에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붓자 그 다음날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줍어하고 소심하였던 그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전장에 나가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나아가서는 예언도 하게 됩니다.
다윗도 사무엘이 기름을 붓자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큰 능력을 행하게 되며, 나이어린 그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며 골리앗같은 장수에게 돌진하여 쳐 죽이게 됩니다.
이처럼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는 평소에 없던 δυναμισ,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 이러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없었거나 너무 약했습니다.
그리하여 마귀의 공격에 참패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기도 전에 모든 것을 강탈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가 주고자 한 것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재산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건강 그리고 나아가서는 믿음까지도 빼앗아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30절 말씀에,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고 한 것처럼,
있는 모든 것, 절대로 주어서는 아니될 것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돈과 물건을 빼앗아 갔으면 됐지 왜 옷까지 벗깁니까?
다 큰 어른이 큰 길가에서 옷 벗김을 당하였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옷을 벗김을 당하였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1절 이하에 보면, 임금의 큰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잔치 중에 있지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옛 습성대로, 내 고집대로, 내 성질대로 잔치를 누리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쫓겨남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강도들이 이 사람의 옷을 벗겼다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의와 믿음까지도 다 빼앗아 갔다는 의미입니다. 이 강도들에 의하여 크리스천으로서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등의 성령의 열매를 다 빼앗기고 옛속성 그대로 드러나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변에서 신앙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고통을 당하고 갑작스런 환난을 당하자 그냥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끔씩 봅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닥났지만 성경 지식은 남아있기 때문에 자신의 아픈 상처와 성경지식으로 예수 믿는사람들과 교회들을 마구 비판하고 욕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믿기전 보다 더욱 나빠지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어설프게 하다가 환난만난 자들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강도들은 이 사람을 때리고 발로차고 옷을 벗기고 거반 죽여 놓았습니다.
엄청나게 두둘겨 맞았지만 완전히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가 우리를 괴롭히고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할지라도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 갈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면 우리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행실이 변하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성화” 의 문제이지 “구원” 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마귀가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수 있겠습니까?
마귀는 절대로 우리의 생명을 빼앗지 못합니다.
그 대신에 우리를 속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였듯이 마귀는 우리를 속여 우리가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도록 유도합니다.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믿음을 포기하고 생명을 포기할때 마귀는 얼른 우리의 생명을 취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도만난 이 사람, 강도들이 심하게 때리고 발로차고 옷을 다 벗겨 피투성이가 되도록 길바닥에 뒹굴려 놓았지만 그의 생명을 건들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처점한 모습, 피투성이가 되어 길가에 뒹굴면서 사경을 헤메는 모습을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봅니다. 하지만 그는 도울수가 없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죽은 시체나 상처입은 자를 만지면 그 몸이 부정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제사를 드릴수 없게 됩니다. 강도만난 이 한사람을 위하여 많은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제사를 그르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제사장의 제사를 돕던 레위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길바닥에 뒹구는 이 사람의 생명을 구원해 줄 마음이 있었더라면, 다른 사람을 보내어 치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 한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 보다 자기들의 제사드려야 하는 의무와 또한 체면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못본척 외면하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우리는 흔히 주일 예배 잘 참석하고 십일조 잘 내고 성경공부 잘 하면 되는줄 압니다.
물론 이런 것도 잘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내 생명처럼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전도나 선교도 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없이 형식적으로 해서는 아니됩니다.
별세 목회로 유명한 이제는 고인이 되신 전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에 전라북도 고부에 처음 교회를 개척하셨을 때의 일이랍니다.
시골이니까 5일 마다 장이 서는데, 장날이 되면 장에 가서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붙잡고 마냥 울었답니다.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이 총각, 왜 그래? 어디 누가 죽었어?” 하고 묻는답니다.
“예, 할머니 영혼이 죽었어요. 그래서 너무 슬퍼서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돼?”
“저기 저 언덕에있는 교회에 나오세요. 일요일 오전 10시에요.”
“그래, 알았어. 이번 주일에 내가 나갈께, 그러니까 고만 울어.”
이렇게 해서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업처럼 영리목적으로 운영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교인들의 영적 상태 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헌금은 얼마나 걷혔는지에 더욱 관심이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물론 교인수가 많고 헌금도 많이 나오면 참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적어도 주님의 몸된 교회라면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혼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원한다면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하튼 오늘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이 강도만난 자를 돕지 못한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강도만난 자를 치료할 포도주와 기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 모두 성전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입니다.
예배를 거룩하고 성스럽게 잘 드리고, 말씀을 많이 습득하였지만 그들에게는 포도주 즉 죄를 씻어내고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피가 없었습니다.
또한 상처를 치유하고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세상의 악을 대적하여 승리하게 하는 기름부으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만난 자에게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발라 줍니다.
왜 하필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유대인들이 무시하고 배척하는 사마리아 인, 그는 곧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배척받던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강도만난 자에게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씻어냅니다.
그리고 씻긴 그 자리에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는 제사장이나 부자들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Tavern 즉 간이식당이 있는 여관, 우리 말로 한다면 방이 딸린 주막으로 데리고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는 제사드릴때 사용하는 포도주와 떡과 기름은 있을 지언정, 이 강도만난 자에게 부어줄 포도주도 기름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 사람에게 부어줄수 있는 포도주와 기름이 있는 이 주막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막은 어떤 곳입니까?
포도주가 있고, 밥을 먹을 식당이 있고, 나그네가 잠을 자고 갈수있는 방이 있는 곳입니다.
저는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가 주막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며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인생은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나그네라고 하였는데, 먼길 걷느라 몸에 상처도 나고, 배도 고프고 지친 나그네가 주막교회로 옵니다.
그러면 큰 방에 같이 모여서 말씀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성령의 술을 돌려가며 찬양 부르고, 아픈 상처에 기름을 부어가며(Anointing and Impartation) 하룻밤 자고 나면 노독도 풀리고 상처도 아물게 됩니다.
그리고 주막을 나설때에는 모두 한 식구가 되어 또 만날것을 기약하며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발을 내 딛는 이러한 교회 말입니다.
저는 지난 토요일 결혼식 때, 우리가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이
분들에게 베풀수 있다는 것에 참 감사를 드렸습니다.
길가의 걸인을 보아도 우리가 도와 주어야 할 텐데,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라는데, 말할 것도 없지요.
여러분들의 작은 정성이 이 사람들을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짐작이나 하십니까?
머리는 파랗게 노랗게 칠하였고 귀걸이는 물론 코걸이까지 하였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 순한 양이되어있는 그들을 보면서 내 가슴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처음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듯 접시에 가득한 음식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곧이어 큰 머핀 두개를 먹어치우던 일곱살난 아이, 금새동난 갈비접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맛있는 것 처엄 먹어 보았다는듯 입맛을 다시던 그 얼굴들, 호주머니에 있던 단돈 4달러를 손에 쥐어주면서 “This is for you, Jesus loves you” 하자, “I never be loved before!” 하면서 흐느끼는 19살의 Amanda, 리셉션장을 빠져나와 침침한 성전에와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던 그녀, 오늘도 주님은 그녀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길 기도하고있습니다.
그날 여러분들의 희생의 수고가 이분들의 삶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들이 베푼 것의 몇 곱절로 갚아 주실 것임을 또한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도 주님의 더욱 큰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아멘.
이제 강도만난 자를 데리고 오신 주님은 주막에 와서 주막 손님들과 하룻밤을 지내십니다.
그러면서 그 곳에서 함께 식물도 잡수시고 포도주도 마시며, 상처난 자들에게 기름도 발라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침에 여관 주인을 부르십니다.
그 여관 주인에게 부비를 주시면서, 나머지 부비는 나중에 다시 오실때 주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모습입니까?
여기 여관 주인은 말세의 일꾼입니다.
예수님은 툭별히 허름한 Tavern 같지만 강도만난 자를 먹일 양식이 있고 씻어줄 포도주가 있고 발라줄 기름이 있는 이 주막교회를 Visitation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교회를 섬기는 자들에게 축복을 주시고, 반듯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오시는 그날, 나머지 부비, 즉 너희가 나를 위하여 세상에서 환난을 견디며 먹은 고난의 떡과 흘린 수고의 땀을 그 날에 갚아주시겠다는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가실때 곧 오시마고 약속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곧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역을 위하여, 인셍 길에서 강도만난자들에게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발라 주느라 세상에서 우리가 먹는 고난의 떡과 흘리는 수고의 땀을 주님은 다 아실 뿐만이 아니라 계산까지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다음에 다시 오실때에 상급으로 다 깊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믿으십니까?
그 날이 임박해졌음을 믿으십니까?
그 날에 주님은 우리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아픔을 치료해 주시며, 다시는 눈물도 고통도 없는 당신의 나라로 인도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