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20

예수님의 리더십

Posted by on Nov 20 2009 at 09:34 am

책망이나 비판이 아니라 좋은 의도로 한 말인데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기 방어부터 하니까 말 하는 사람이 무안해서 어쩔줄을 모른다. 그 틈을 타서 상대방의 실수를 들춰서 역공격을 하여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을 보면서 옛날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왔다. 상대방의 이야기에는 무조건 귀를 막고 자기변론에 바쁘며, 나중에는 상대방을 공격하여 말을 막아버리는 그 모습이 안타깝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상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자존감이 약해졌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받아드릴 아무런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그만 지적에도 발끈하게 되는 것이다.

옆에서 보는 내가 너무도 안타까워, “그렇게 하시면 좋은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다 떠나고 주변에는 오직 가신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 나오는데 억지로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들을 귀가 없을 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도자는 칭찬뿐만이 아니라 책망의 말도 잘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기분 나쁜표정으로나 건성으로 듣지 말고 혹은 중간에 차단하여 변론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다 내려놓고 끝까지 진지하게 들을수 있어야 한다.

타면지건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당나라때 누사덕이 고위 관직에 책봉되어 떠나는 아우에게 “주변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애매한 소리와 억울한 누명도 쓰게 될수도 있을텐데 대책이 있느냐?” 라고 묻는다. 그러자 아우는, “형님, 사람들이 제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할지라도 난 응수하지 않고 조용히 침을 닦아내겠습니다” 라고한다. 그러자 형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타면지건 하라” 고 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조용히 닦아낸다 할지라도 자기가 뱉은 침을 닦아내는 너의 그 모습을 보는순간 상대방은 더욱 분노할수 있다. 그러니 그 침이 다 말라 없어질때까지 닦지말고 그대로 두라는 뜻이다. 어차피 침은 마를 것이고 그러면 안보이게 될 터이니 그냥 그때까지 참아라 는 의미다.

사람이 어떻게 칭찬만 듣고 살수 있겠는가? 늘 자기 편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남편이나 아내로 부터도 잔소리를 듣고 책망을 듣게 되는데, 그룹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라면 웬만한 비판에는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남이 내뱉는 쓴소리를 그냥 못들은 채 하고 넘어가는데에서 그치라는 것이 아니다. 억울하고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아플지라도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고쳐야 될 것은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는 자신을 깍아 내리고 헐뜯는 비평들을 어떻게 감정없이 잘 듣고 소화하느냐에 따라 그 역량이 좌우된다. 그런데 반대편에 선 사람들로부터 받는 비판이나 책망은 그래도 비교적 견딜만 하다. 하지만 자기 측근이
그럴 경우에는 배신감까지 들기 때문에 더욱 힘들고 슬프게까지 한다. 하지만 아무리 큰 바위덩이가 떨어져 큰 파도가 일게 한다할지라도 잠시후에는 다시 잠잠해지는 깊은 호수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누가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마져 대주라고 하셨는데, 힘들기는 다 마찬가지인데 타면지건과 어느쪽이 더 힘들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즉 능동적으로 왼뺨을 내 놓으라고 하셨는데, 타면지건은 수동적으로 그냥 참으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뺨을 맞는것 보다 뺨에 침뱉음을 당하는 것이 더욱 치욕스러울 것 같다.

여하튼 훌륭한 목사소리를 들으려면 “타면지건”을 하도록 노력해야지 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혹이 많다. 경찰들의 단속이 심한지라 고속도로의 중간선을 달리면서 제한속도를 넘지 않으려고 애를썼다. 그러자 뒤에 따라오던 차가 바짝 븥어온다. 그래도 똑같은 속도로 달리자 옆차선으로 비켜 달리면서 창문을 내리라고 손짓한다. 그래서 옆을 보았더니 갑자기 가운데 손가락을 쑥 올린다. 얼른 못본척 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아차, 타면지건해야지” 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렸더니 만족한듯 웃고간다. 그 전 같았으면 “가다가 Speeding 티켓이나 받아라” 고 중얼거렸겠지만 참았다.

집에오니 딸 아이가 주차위반 티켓을 받았다고 투덜거린다. 차를 길가에 파킹하면 되었는데 밤에 길에서 건물까지 걸어가기가 너무 멀고 무서워서 건물 앞에 파킹했다가 티켓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내 탓이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좀 일찍와서 자기를 태워다 주었으면 그런 일이 안 생겼을 것이 아니냐고 한다. 참 논리정연한 핑계다. 그래도 타면지건해야지 하면서 살며시 웃고 넘어갔다.

저녁을 먹고 빈그릇을 싱크대에 놓아 두고 컴퓨터를 켰더니 처가 따라오면서 한마디 한다, “요즘에는 설거지도 한번 하지 않고……” 다른 때 같았으면 “조금 있다가 하려고 했는데, 아니면 밥먹고 아직 숨도 안돌렸어 잠시만 기다려” 라고 대꾸했을 텐데, 타면지건해야지 하고 꾹 참고 설거지를 하였다.

하루도 아니고 그저 몇시간동안 타면지건 하기도 이렇게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데, 과연 그 누사덕인가 하는 사람과 그 동생은 타면지건을 했을까? 아마도 그렇게 했으니까 그들의 대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회자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분들의 마음은 얼마나 깊고 컸을까? 내일 새벽부터는 나에게도 누사덕 형제만큼 크고 깊은 마음을 주셔서 나로하여금 타면지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겠다.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 김진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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