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20
예수님의 리더십
그간 교회내 분쟁으로 시달려왔던 동양 성결교회 강준민 목사가 마침내 사임을 했다고 한다. 법정시비로 이어진 동양 성결교회의 분쟁으로 말미암아 교계는 물론 교포사회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었는데, 강준민 목사가 법원의 판결에 대한 항소를 포기하고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마침내 종결되었지만 이 문제로 얼룩진 상처는 쉬 아물지 않을 것이라는 여운을 남긴 기사였다.
교회 분쟁에는 승자가 없다. 모두 패자일 뿐이다. 그리고 가장 큰 상처와 피해를 입는 분은 목회자도 교인들도 아닌 교회의 주인되시고 머리되시는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의 피를 팔아서 산 자녀들인데, 이 자녀들이 서로 다툴때, 그것도 서로 아버지를 위해서라면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이 맞선 모습을 볼때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실까? 이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 서로 양보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도없이 왜곡되어져 가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싶고 또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세상에 증거하고 싶은 부담감 때문에, 여기서 양보하면 진실이 그대로 묻혀버릴까 하는 거룩한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여 세상에 알리는 것이 주님께서 나를 향한 뜻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나를 통하여 우리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분쟁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수도 있다.
그런데 분쟁이 생기면 목회자가 더 큰 양보를 해야한다. 자기가 먹이고 가르치고 양육해온 양들을 어떻게 힘으로 대항할수 있겠는가? 무력으로 승리하고서 어떻게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가르칠수 있겠는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말씀을 어떻게 선포할수 있을까?
바울 사도께서도 법정에서 여러번 변론을 하셨지만, 자신을 위하여서는 한번도 제대로 변론하지 않으셨다. 누군들 자신의 결백을 증거하고 싶지 않겠는가? 더구나 자기의 생명이 달려있는 문제라면 얼마나 더욱 간절하겠는가?
빌라도 법정에 서셨던 예수님께서 왜 침묵으로 일관하셨을까? 왜곡된 주장과 꼬임에 빠진 군중들의 외침에도 주님은 왜 한마디도 하시지 않고 침묵하셨을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만 천하에 공개할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왜 주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을까? 만일 주님께서 진실을 밝히셨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면 목회자는 물러서야 한다. 목회자가 잘못했기 때문에 교회내에 분쟁이 일어나게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서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문제도 책임지지 못하는 미천한 인간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머리되시는 교회의 문제를 목회자가 책임지고 물러나란 말인가?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이시요 양들도 예수님의 양들이니까 주인되시는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방법대로 해결하시도록 목회자는 물러서야 한다.
또한 죽는 것이 사는 것이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물러서야 한다. 요압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기뻐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통곡했다. 자기를 죽이려고 이스라엘 온 군대를 총동원하여 쳐들어 왔을때 다윗은 차라리 자기가 죽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그는 너무도 가슴아 아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라며 통곡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분쟁하는 자녀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목회자가 물러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직 이루어야 할 소명, 말씀을 선포하고 주님의 양들을 양육하고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라톤을 하자면 중간에 장애물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 장애물을 피해가는 지혜가 있어야겠지만 때로는 피할수 없는 장애물도 있을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애물을 핑계대고 마라톤을 포기해서는 아니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장애물이 많고 험하다 할지라도 면류관을 위하여 쉬지않고 달려가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길이 아니겠는가?
추수감사주일이 다가온다.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Mayflower 호를 타고 온 청교도들이 그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생존하였으며, 자기들 먹기도 부족한 음식을 놓고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즐겼다는 추수감사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된다. 그리고 미국의 정신이 바로 이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청교도 정신이라고 너무도 쉽게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말할수 있겠는가?
청교도들이 Plymouth 에 도착하기 훨씬 전인 1607년 영국의 James 왕은 London Company 를 통하여 Virginia 주에 James Town 을 건설했다. 그들은 무력으로 원주민을 몰아내고, 금광맥을 찾아 여기저기 파헤치며 식민지를 건설해갔다. 하지만 이것을 미국의 정신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진정한 승자는 이웃을 정복하는 자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화무 배일홍이요 권불 십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력으로 정복한 것은 오래지 않아 다시 빼앗기지만 사랑으로 정복한 것은 영원하지 않은가?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주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모진 매를 맞아가면서도 아무런 변명없이 침묵하셨던 것은 아닌가? 주님 때문에 희생을 당한 자만이 십자가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가질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저 천국에서 누릴 축복을 미리 보면서 진정한 승리를 외칠수 있지 않겠는가, “다 이루었도다” 십자가에 달린채 승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처럼.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
김 진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