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04

예수님의 리더십

Posted by on Nov 04 2009 at 11:21 pm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Homeless 한사람을 보았다. 영하의 날씨는 아니지만 그래도 밤새 추위에 떨었는지 두꺼운 옷을 입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벤치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않고있다. 마침 크래커가 하나 있어서 권했더니 “I do not need that. Do you have a cup of coffee?” 한다. “얻어 먹는 주제에 된밥 찬밥 찾다니……” 라는 생각이 든다. “알았다, 나중에 갖다 주마” 라고 별 생각 없이 대답해 버리고 왔다.

그런데 집에와서 생각하니 아무리 무심코 한 가벼운 약속이지만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혹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나는 갑자기 무심코 어린 소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중요한 약속까지 파기한 루소가 된 것이다. “그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찾을수도 없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Starbucks Coffee Shop 에 가서 Large Size Coffee 를 한 컵 사서 갖다 주었다. 진정으로 그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나의 진실과 결백을 증명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커피를 보자 거무잡잡하면서도 핏기가 없어 보이는 얼굴에 금방 희색이 돌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고는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Thank you, 하더니 컵을 받자마자 갈증 난 사람처럼 한 모금 죽 들이킨다. 돌아오면서 뒤돌아 보았더니 벤치에 반쯤 누워서 그 커피를 바라보며 즐거워한다. 한잔의 커피, 이 작은 정성이 이 사람을 이렇게 즐겁게 할 수 있다니 라는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주변에 Homeless 들과 걸인들이 부쩍 늘은것 같다. 시내로 들어서는 고속도로 Exit 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얼마나 힘들면 구걸을 할까? 마음같아서는 만나는 대로 다 도와주고 싶지만 나 살기도 힘든 형편에 그렇게 할수도 없지 않는가? 기대감을 가지고 접근해오는 그들의 얼굴을 피한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저녁밥을 먹는 시간쯤 되면 소방소에서 그리고 경찰서에서 적선하라고 전화가 온다. 그리고 거의 매일같이 선교기관, 자선기관, 청소년 보호기관 등 여러단체에서 어떻게 우리 주소를 알았는지 친절한 편지들이 온다. 그리고 편지보다 두배도 더 많은 E-Mail 들이 적선을 기다린다.

돕고는 싶지만 그렇다고 도울 수도 없는 부담을 안은 채 누가 복음 9:11-16절 말씀을 가지고 “인간의 한계” 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다. 배 아파서 난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가 있을까? 열이면 열 스물이면 스물 다 자기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더구나 남편도 없는 과부가 자기 외아들에게 쏟는 사랑은 얼마나 더 처절할까? 아들을 살릴수만 있었다면 자기 목숨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내 놓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하였다. 온 동네사람들이 진심으로 울며 그 과부의 외아들이 살아나기를 바랐지만 끝내는 관속에 넣어야만 했다.

우리는 고통 받는 이웃을 위로하고 같이 아파해 줄 수는 있어도 그들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인색해서도 악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다. 만일 우리 스스로 이웃의 문제까지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문제 조차도 해결하지 못하지 않는가?

의사도 임금도 부자도 죽은 자의 장례행렬을 멈추게 할 수 없었지만,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하였지만, 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장례 행렬을 멈추고 죽은 청년을 살리셨다.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방법을 포기하고 주님께 맡길 때가 곧 예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때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이웃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의 도움을 청하라 고 설교를 마쳤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자 마자 한 분이 오시더니 자기 회사에서 일하시던 목사님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을 그만 두셨다고 한다. 영주권이 없기 때문에 특별히 생각해서 Cash 로 월급을 주었는데, 말도없이 그만 두었다고 대단히 실망한 눈치다. 미리 이야기를 해야지 회사에서도 대책을 세우는데 마치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처럼 퇴근시간 다 되어서 간단하게 몇 자 써서 자기 테이블에 놓고 퇴근해 버린 것이다. 더구나 무슨 일을 저질러 놓고 무책임하게 그만둔 것이라며 그 목사님의 인격을 의심하는 발언을 한다. 물론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변호하였지만 설득력이 없다.

애당초 이런 사람들을 채용한 것도 잘못된 일이지만, 영주권이 없는 상태에서 직장을 구했다는 그 자체가 목회자로서 더 큰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사실 자녀들의 교육문제나 혹은 본국에서의 여의치 않은 사정때문에 여행 비자로 와서 이렇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똑같은 불법일지라도 일반 사람들 보다는 더 높은 도덕적 윤리적 수준이 기대되는 목회자의 경우에는 파장이 더 크다.

이 사람의 눈에 목사는 어떤 존재로 보일까? 나도 목사인데 이 사람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은 어떨까 생각하니 맘이 편하지 못하다. Homeless 보면 어떻게 도와줄꼬 고민한다고 한 나의 말이 진실로 받아드려질까? 지난 주 설교는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혹시 “너나 잘하세요” 라는 식으로 받아드리지는 않을까? 만감이 교차한다.

이웃을 도와 주는 것도 매우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역시 자기 신분을 잘 지키는 것이다. 목사는 설교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도 물론 매우 중요하겠지만,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목회자로서의 성품내지는 인격이 아니겠는가? 우선 나부터 내가 강단에서 설교한대로 살아가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부담이 가슴을 압박해온다.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 김 진환 목사  Agape2000@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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