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4

잃었던 신앙의 회복(룻기 4:09-12절)

Posted by on Aug 24 2009 at 07:57 pm

May 31/2009

하나님께서 룻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처음부터 말씀을 드렸듯이, 잃었던 신앙의 회복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고, 사사들이 일어나서 통치할 때 백성들은 누구나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각기 자기 잘난 맛에 자기 주장대로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한다고 음란하다고 무시하던 모압여자를 통하여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깨우쳐 줍니다.

모압지방에 이민온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하였는데, 그 아들이 애 하나도 낳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가산도 다 탕진하여 먹고 살수가 없게 되자, 나오미는 유다로 다시 역 이민을 오게 됩니다.
그때에 이 며느리 룻, 아직 젊은 나이요 유대로 이민을 가면 모압 여자라고 무시를 당할 것이요, 또한 언어장벽도 심할 것 뻔히 알면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살겠다고 따라옵니다.
그리고는 오자마자 남의 밭에서 보리이삭을 줏어서 먹고 살다가, 드디어 그 밭주인 보아스와 결혼을 계획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 말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법으로 보아스는 룻과 결혼을하여 나오미의 온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지만, 룻이 모압여자인지라 그렇게 강요할 수는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면 보아스가 청혼을 해 주면 좋은데, 보리 이삭을 줏게하고 친절하게 해주고 또 덤으로 보리를 퍼주기도 하였지만, 결혼에 대하여서는 일절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시키는대로, 룻은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고 타작마당으로 가서 피곤하에 잠든 보아스의 이불을 들치고 들어갑니다.

하루종일 일하다가 이제 보리 타작마당에서 피곤하여 곤히 자는데 갑자기 그 이불 속으로 들어와 결혼해 달라는 룻을 위하여 보아스는 날이 새자마자 사방으로  열심을 내며 뛰어다닙니다.

보아스 입장에서는 지금 보리타작이 중요하지 결혼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지만, 룻과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 결혼이 성사될지 안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 부절합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룻의 입장을 잘 아는지라, 자기 일은 만사를 제쳐놓고 이 혼인을 서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인식을 하기 전에 거쳐야 할 법적인 절차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성읍 장로회를 소집하여 자기보다 서열이 앞섰던 자기 친척에게, 룻과의 결혼할 의사를 타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거절하자 그 사실을 장로회에 공포하였고, 자신이 룻과 결혼하겠다고 공식 선언합니다.
바삐 서두르면서도 대충하지않고, 한치의 법도 어김이 없이 철저하게 순서를 밟아가며 이 결혼식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성읍 장로회에서는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합법적이라고 선포하면서, 새로 태어날 부부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11-12절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우리와 함께하심과 그로말미암아 엄청난 축복을 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베들레헴 사람들은 공동체의 신앙회복을 축원하였습니다.
11절에,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기를 원한다”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는 야곱의 두 아내로서, 이스라엘 12 지파의 어머니 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집을 세웠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정을 소개하자면 좀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야곱이 자기 형 에서와 자기 아버지를 속여먹자 자기 형이 죽이려고 합니다.
겁을 먹은 야곱은 수만리 떨어진 자기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치는데, 자기 외삼촌의 둘째딸 라헬이 참 예쁩니다.
그래서 자기 외삼촌에게 그 딸을 아내로 삼게 달라고 하였더니, 7년을 머슴살이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7년을 머슴살이 하였더니, 결혼식을 올려주는데, 야곱이 너무 좋아서 그날 술을 먹고 완전히 취해버립니다.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 첫날밤을 치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기가 사랑하던 라헬이 아니라 그 언니 레아입니다.

그래서 곧장 자기 외삼촌에게 따졌더니, 이곳 풍습에 동생부터 시집을 보내면 언니는 혼인길이 막힌다, 그러니 7년을 더 머슴살이를 하여라, 그러면 라헬도 아내로 주마 라고합니다.
그래서 도합 14년을 머슴살이를 하면서, 두 아내를 거느리게 되는데, 이 아내들이 형제간임에도 불구하고 질투심이 어찌나 많은지 서로 아들을 많이 나려고 경쟁을 합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자기들의 몸종, 즉 여자 하녀들도 자기 남편에게 바칩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졸지에 아내를 4이나 거느리게 되고, 이 4 여자들을 통하여 12 아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외삼촌 집에서 살면서 어느덧 21년 이라는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이제 웬만하면 외삼촌과 함께 평생을 살까도 했는데, 외삼촌이 품삯도 속여먹으며 계속해서 자기 머슴으로 부려먹으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하는수 없이 야곱은 처자식을 다 데리고 외삼촌 집을 도망나와 고향으로 돌아오고자 합니다.
그런데 형과 싸운지도 이미 21년이나 됐으니까, 혹시 자기 형이 자기에 대한 노여움이 풀렸는지 아니면 아직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지 걱정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에게 고향에 돌아오겠노라고 전갈을 보내자, 아직도 화가 안풀린 형이 장정 400명을 데리고 자기를 죽이려 온다고 합니다.

이제 내일이면 형과 만나게 됩니다.
큰 일 났습니다.
야곱은 형이 와서 한쪽을 치면 나머자 다른쪽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자기 종들도, 짐승들도 그리고 맨 나중에 자기 처 자식들도 모두 두 떼로 나눕니다.
그리고는 얍복강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이 강을 건너고 날이 밝으면 형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짐승들, 종들, 그리고 처지식까지 모두 그 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는 불안하여 건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강 이쪽에서 혼자서 방황하고 있는데, 날이 어둑해지자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서 씨름을 하자고 시비를 겁니다.
씨름이라면 한가닥 하던 사람이었던 지라, 그리고 마음도 무척 괴로운데 잘 되었다 싶어 씨름을 하였는데, 이렇게 센 상대는 이전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밤새 젖먹는 힘까지 다하여 겨루었는데도, 이제 지쳐서 힘이 하나도 없는데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졌다고 항복하지 않고 그 사람을 놓지 않자, 그 사람이 야곱의 엉덩이를 한번 탁 칩니다.
그러자 자기 엉덩이 뼈가 썩은 막대기 부러지듯 힘없이 부러져 버립니다.

그 때서야 그 분이 하나님이신줄 알고 야곱은 부러진 다리를 질질끌며 간청합니다, 제발 축복을 해 주시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 손을 절대 안놓겠다고.
그러자 하나님이, 네 이름을 이제부터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 라는 의미로 “이스라엘” 이라고 하라 합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야곱의 12 아들을 통하여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라헬과 레아는 야곱에게 시집와서 이스라엘 이라는 새로운 민족,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형 에서 둘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지만, 이때부터 형 에서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에서가 모든 것을 장악하였고, 야곱이 그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였고, 에서가 세운 나라가 훨씬 강성하였지만 자기의 지략과 능력을 의지하였던 그들은 한동안 야곱이 세운 이스라엘을 괴롭히다가 마침내는 역사속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힘없고 그래서 고통속에 성장하는 야곱을 통하여 새로운 믿음의공동체 “이스라엘” 을 통하여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사람들이 룻에게,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라고 한 것은 룻을 자기 민족의 어머니가 되어달라는 간청입니다.
왕이 없이 사사들이 자의대로 통치하며, 백성들도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그 혼란을 청산하고 새로운 믿음의 어머니가 되어달라는 간청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심히도 약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야곱이 사력을 다하여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과 겨뤄 이겼다” 라는 축복을 받아 내었듯이, 야곱과 같은 사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아내는 기도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내일은 6월 첫날인데, 내일 부터 오전 4:30분 부터 7:30분까지 기도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하고 있지만,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졸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졸지않고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자,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약속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6개월 이내에 하나님의 큰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행합니다.
특히 새로운 예배 장소와 여러분들의 신앙, 가정, 사업등을 위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루 3시간은 힘들겠지만, 30분 씩이라도 같이 기도하셔서, 우리 생명의 강 교회에 일어나는 주님의 크신 역사하심을 같이 동참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 베들레헴 사람들은 룻을 통하여 메시아가 태어나기를 축원하였습니다.
12 절에,”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을 하는데,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아이를 낳은 것은 도덕적으로 매우 수치스런 사건이지만 성경은 다말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유다의 맏아들과 결혼하여 아무 아들도 없이 남편이 죽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의 동생인 오난과 재혼을 하였는데, 오난 역시도 아이들 낳지 못하고 죽습니다.
한편 시아버지 유다의 입장에서는, 이 며느리에게 결혼을 했다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셋째 아들은 그녀에게 결혼시키지 않고, 애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친정으로 돌려 보냅니다.

한편 친정에서 수절하고있는 며느리 다말이, 세월이 몇년 지났어도, 즉 셋째 아들 셀라가 어른이 되었어도 자기를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 시아버지가 그 아들과 결혼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안 이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합니다.
그리하여 시아버지를 통하여 아들을 낳게 되며, 그 아들의 이름이 베레스입니다.
그리고 다말이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 베레스는 유력한 자로서, 유다 지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고, 보아스를 포함한 베들레헴에 살던 유대인들도 대부분 베레스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룻에게 이 며느리 다말처럼 축복을 받는 여인이 되라고 축복을 합니다.
사실 유다의 며느리 다말 역시도 유대인들이 꺼리는 가나안 여인, 즉 룻처럼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수없는 그러한 끔찍한 계책을 꾸며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말을 성경은 오히려 두둔하며, 이 여인에게 아들을 주지않은 유다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여자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올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 마다 아이들, 특히 아들을 낳기를 원하였습니다.
물론 아들이 좋아서도 그랬겠지만, 자기의 몸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기를 고대하는 마음에서 더욱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다말이 불륜의 죄를 범하였지만, 얼마나 가문의 대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바랐으면, 그리고 자긔 태를 통하여 메시아가 태어나기를 얼마나 바랐으면 그랬을까?
자신의 유익이나 명예가 아닌, 오히려 자기 한몸 희생시켜 가문을 살리고 메시아의 왕림을 보고싶다는 여인의 간절한 소망의 행위로 간주하며 오히려 다말을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때, 룻이 보아스와 혼인하고자 그의 잠자리에 들어간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지 못하는 욕정도 아니요 보아스의 물질이 탐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가문의 대를 잇고자 함이요, 그 태를 통하여 메시아가 나기를 바랐던 소망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레스의 후손들은, 다말을 통하여 유다 지파의 장자혈통이 계승되고 유다지파에서 가장 강력한 큰 가문을 이룬 것처럼, 룻을 통해서 베레스 가문이 다시한번 크게 일어서, 마침내는 그 가문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시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셋째,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자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보아스를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합니다.
이미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지만, 보아스의 집에 들어가는 여인 룻으로 말미암아 더 유력한 사람이 되리라는 축복입니다.

사실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여러 면에서 말거리가 될 만했습니다.
우선 신부는 그들이 추하고 더럽게 여기는 모압여자이고, 그것도 과부입니다.
또한 신랑 역시도 이미 한평생 살만큼 산 영감님입니다.
신랑은 그 지방의 존경받는 유지였으며 엄청난 부자였지만, 신부는 그들이 무시하는 민족의 여자로서, 신랑의 밭에서 보리이삭을 줏어먹고 살던 극빈자입니다.
이처럼 나이, 신분, 빈부, 민족, 혈통, 문화, 언어등 그들이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장벽은 너무도 크고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엄청난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가 보아도 고개를 흔들만큼 비정상적이고 문제점 많은 이 결혼이 온 동네 사람들의 최고의 축복을 받는 결혼이 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보아스와 룻에게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가치를 발견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재산에 손해가 된다고 당연히 해야 할 의무도 거부하는 세상이었지만, 보아스는 자기의 가진 것으로 힘없고 가난한 이웃 돌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됨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가난을 친구삼고 평생을 외롭고 쓸쓸하게 살 각오로 온 룻, 하나님께서 어찌 그냥 놓아둘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 남자들은 예쁘고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려고 하고, 여자들은 돈많고 성품좋은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종교야 나중에 맞춰가며 살면 되지요 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살면서, 종교가 같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이미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여하튼 보아스와 룻, 세상적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비정상적인 결혼인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름답고 축복된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 세워진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성군인 다윗왕이 태어나게 하시고, 또한 메시아가 태어나게 한 축복이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끝으로, 룻의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지금까지 룻이 시어머니와 고난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힘겨운 생활을 하다가, 이제 신분이 바뀌고 행복에 겨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룻은 가난한 과부 나오미의 며느리였지만, 이제는 좋은 집에서 맛잇는 음식을 먹으며 종들을 거느리고 사는 보아스의 아내입니다.

남편도 죽었고 더구나 새로운 남편을 모시고 살아야 하니, 이제 더이상 시어머니를 섬겨야 할 의무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더이상 나오미의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보아스의 아내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보아스의 아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오미의 며느리로 살아갔던 것을 봅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울때에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합니다.
그러다가도 좀 살 만해지고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을 때 싸우고 갈라지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어제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지내던 가족들이 갑자기 상속문제에 부닥치면서 법정에까지 가서 서로 싸우는 일들을 종종 보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완전히 남남이 됩니다.
형제간에 재산싸움 하는 것보다 추한 꼴이 없지요.
그런데 그런것을 볼때마다 가슴이 참 아픕니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미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않고 지킬 도리 지켜가면서 겸손하게 사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압 여인 룻, 과부에다 가진것도 하나 없던 여인, 오직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하나러 살던 이 여인을 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심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을 무시하고 다럽고 사악한 민족으로 정죄하던 유대인들이 이 가녀린 모압여인 앞에 와서, 우리의 믿음의 어미가 되어 주소서 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 상황을 생각하며 우리 같이 기도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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