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1
예수님의 리더십
빌 클링턴 전 대통령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면담하는 중에 그간 억류되었던 두 여기자를 석방하는 모습을 각국의 언론들은 앞을 다투어 보도하였다.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한편, 김정일은 세계의 언론 앞에서 자신의 Power 를 다시 한번 과시한 셈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대하는 각국의 반응은 달랐다. 특히 미국은 애써 축소화시키려는 태도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춰질 일도 덮어질 일도 아니다. 북한은 이미 자기들이 유리한 부분을 확대하면서 세세한 내막까지도 널리 확대 보도하였다.
그런데 이 문제로 인하여 가장 당황한 것은 우리 정부일 것이다. 재미 동포가 석방이 되었는데 축하해야 할지 우리 정부와의 아무런 합의도 없이 단행한 미국에 불만을 표해야 할지 표정관리가 참 힘들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의 대북 정책에 불만이 많은 터에 이런 일이 발생하자 정부의 무능력에 대하여 비판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좌불안상이 되었다.
그간 잃어버린10년이라면서 전 정권 때의 대북정책을 Scapegoat 로 내세워 북한에 대하여 동정심이나 우호적인 태도를 표하는 자들은 물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까지도 좌파로 몰아 부치고, 현정부의 비판이 나올 때마다 그 원인과 책임을 모두 좌파 탓으로 돌려 왔던 것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 논리라면 클링턴 전 대통령이나 이번 일을 추진한 미국 정부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좌파가 아닌가?
그렇다고 정부 비판을 일삼는 좌파들은 내세울 만한 업적이 있는가 살펴 보아야 할 때다. 중대한 이슈, 민족애, 나라사랑이 아닌 지역감정이나 소수의 영달을 위한 탐욕에 사로잡힌 비판이나 불평은 자중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지 않는가? 자녀들에게는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라고 가르치면서도, 어른들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자라는 자녀들의 미래에 대하여 조금은 염려를 할 때도 되었지 않은가?
그런데 그보다 더욱 내 마음을 끈 것은 빌 클링턴 전 대통령의 태도다. 그는 줄 곳 침묵을 지키다가 끈질긴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한 일은 단 한 가지, 억류됐던 미국 기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으로 미국인으로서 아버지로서 매우 영예로운 일이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말하는 것은 이곳이나 북한의 결정과 분위기, 우리 우방들의 태도에 무심코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미국에는 한 시대에 한 명의 대통령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우리 정부에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앞으로 취해질 수도 취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결정들의 균형을 흔들 수 있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라는 등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클링턴 전 대통령의 연설을 좋아하게 된 것은 오클라호마 정부청사 폭발사건 때다. 그는 희생자 합동 장례식에서,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를 남편을 아내를 그리고 자녀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은 여러분들을 잃지 않았습니다. 조국이 여러분들을 도울 것입니다.” 이 말이 어찌나 감동이 되던지 나도 모르게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언제나 대통령이 자기 백성들에게 저렇게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생각하였다.
한편 이렇게 연설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 인턴사원과의 스캔들과 부인의 낙선에 몰락해져 가는 자신의 이미지를 크게 부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그는 극히 조심하면서 자신은 이제 하나의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임을 강조하였다. 만일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이 이런 일을 수행하였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클링턴 전 대통령처럼 현 정부 정책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자중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큰 파장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개인의 인품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나라 안팎 분위기가 그렇게 잠잠하고 있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언론은 그에게로 집중될 것이고, 분위기에 들뜬 나머지 꼭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아니 될 말을 가리지 않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까지 덧붙여서. 그러면 신문은 서로 경쟁하듯 이러한 기사를 여과 없이 경쟁적으로 싣게 될 것이고, 결국 회담은 실제 내용과 상관없이 여론에 의하여 매도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염려 때문에 우리나라는 아직 전임 대통령들을 대북 특사로 보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클링턴 전 대통령의 이러한 겸손과 오바마 대통령을 배려하는 태도를 보고 교회에서도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교회 사정을 제일 잘 아는 전임목사가 아직 모든 것이 새롭고 적응하기에 바쁜 후임목사를 세워주고 사랑해 주며, 후임목사는 이러한 전임목사를 존경하는 교회 성도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자들일까?
물론 이런 정서가 정착되려면 전임자나 후임자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교회 내에 전임 자는 후임자를 비방하지 않고 후임자는 전임자를 경계하지 않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경쟁이 필요하다. 경쟁이 없으면 동기부여가 없어지기 때문에 타락하거나 발전이 없게 된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원래의 근본 목적을 상실하게 하거나 왜곡하게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사랑이란 무엇이겠는가? 결국은 이웃을 먼저 배려하라는 것 아닌가? 이웃을 먼저 배려하는 정서가 교회에서, 그것도 목회자들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이웃을 배려하는 정서가 더 큰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명의 강 교회 김 진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