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11
예수님의 리더십
아이들이 방학을 하자 Internet Game, 특히 Maple Story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것 같다. 그냥 말려서는 반발이 너무 심할것 같고, 어떻게 해야지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까 하고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리고는 내가 먼저 말을 하였다:
아빠가 인터넷에서 신문을 보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하는 것 같다. 독일의 유명한 설교가 칼 바르트가 “한손에는 성경 한손에는 신문” 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라고 하여서 나도 시대성에 맞는 설교를 준비한다는 명분하에 인터넷 신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겼다. 그런데 컴퓨터를 키면 인터넷 신문은 정말로 “One click away ” 에 있지 않느냐. 그 유혹을 물리치기 힘드니까 인터넷을 끊는 것이 좋겠다.
그러자 아이들을 반발이 만만하지 않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전기도 없는 아프리카 오지가 아니라 미국에서 살아요. 어떻게 미국에서 인터넷도 없이 어떻게 살라는 말이에요. 지금은 인터넷 시대인데 이것은 말도 안돼요. 아빠, 세상에 눈 좀 뜨세요.
그래서, “아빠는 너희들 만 할때 인터넷은 커녕 텔레비젼도 없이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밖에서 친구들하고 놀았고, 집에 돌아오면 집 청소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저녁 밥 먹고 곧 자고.” “그것은 아빠 사정이고,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인터넷에 대하여 몰랐으니까 인터넷 없이도 불편한지도 모르고 지냈지만 지금은 누구나 다 있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 시험삼아 우선 두주간만 인터넷 없이 살아보자” 하고서 인터넷을 끊었다.
그런데 당장 E-Mail 도 보아야 하고, 무엇을 잘 모르면 주로 인터넷에서 찾았는데, 집에 인터넷이 없으니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내가 끊자고 하였으니 잠자코 있었는데, 그렇게 겨우 3일이 지나자, As you see we do not have a life! 라며 아이들이 인내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래서, “너희들 인터넷이 없이는 살수 없을 것 같았는데 잘 견디고 있지 않니? 오늘날에도 우리는 인터넷 없이도 살 수 있어! 한주간만 더 참자” 라고 달랬다.
그렇게 나의 불편함과 아이들의 불평에 시달리며 힘든 나날을 지내던 어느날 저녁 요한복음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는 구절을 가지고 묵상을 하는데, 갑자기 억제할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 위하여, 나같이 미천한 자와 함께 살기 위하여 말씀이 고기덩이, Logos 가 Sarke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Logos 는 살아있는 최고의 진리인데, 이 Logos 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Logos 는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무엇 때문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나? 왜 무엇이 아쉬워서 혹은 무엇이 부족하여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는가? 우리 인간과 같이 사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때 얼마나 많은 불편과 고통을 겪으셨을까?
인어공주, Little Mermaid 이야기에, 바다왕국의 공주가 인간을 사랑하여서 그와 결혼하기 위하여 희생해야 하는 것들이 나오는데, 그녀는 우선 바다 왕국의 공주의 권세를 포기하여야 했다. 또한 물속을 자유 자제로 다니면서 누렸던 모든 권세와 특권을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같이 살아왔던 궁중식구는 물론 자기의 친한 친구들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곁을 영영 떠나게 되는데, 특히 그의 아버지가 그 딸을 향하여, “내가 지금부터 어떻게 너를 잊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라고 하는 장면이 참으로 가슴을 찡하게 한다.
물론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물고기가 “어육신” 하는데에도 이러한 희생이 따랐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시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큰 희생을 하셔야만 했던가? 나와 대화하며 같이 살기 위하여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셨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이 마음대로 사시던 그 분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 세계로 오셔서 격는 불편이란 말로 형용할수 없었을 것이다. 자동차만 있다가 없어도 얼마나 불편한지 모르는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사시던 하나님이, 추운 겨울 마굿간에 태어나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살려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리고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고 살점이 묻어나오는 채찍으로 맞으시고 비틀거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가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밖혀 죽임을 당하기 까지 하시는 주님, 그런데 오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성육신” 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성육신이란 오직 예수님만 하신, 우리 인간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결국 상대방과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하여 나를 낮추어 상대방의 레벨로 내려가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맺는 공동체를 이루시기 원하셨던 것 아닌가? 그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 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주변 사람들과 성육신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엄청난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가 먼저 그 희생을 보이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보여 주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 당장부터라도 이 성육신 개념을 가족에게부터, 교인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적용해 보고자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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