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08
Repaking Your Bags(룻기 3:7-20절)
May 17/2009
Richard Leider 는 Repacking Your Bags 네 가방을 다시 싸라 는 책에서, 사람이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은,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면 “의미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될 것 같고, 그것이 정말일 것 같은 것” 생각이라고 주장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이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그러한 비참한 생각이 들까봐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차라리 교회 열심히 잘 봉사하느라고 이렇게 되었으면 예수님께 할말이라도 있는데, 그렇지도 못하고서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후회스럽고 괴롭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실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래 나름대로 열심히 잘 살았어, 잘했어” 라고 장담할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그 시절로 돌아갈수도 없지만, 설령 돌아가더라도 엇비슷한 실수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과거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아주 잘 할 것 같은 생각에 우리는 현실을 보면서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믿는 사람들은 과거에 전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입니다.
본문의 나오미나 룻도 자신들의 슬프고 괴로운 과거에 매이지 않고, 앞을 보며 나아가듯이,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여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에 보았듯이, 나오미의 식구들은 보리이삭만 줏어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보리이삭을 일년 내내 많이 줏을수만 있다면야 걱정이 없겠지만, 만물이 다 때가 있듯이, 추수가 끝나면 그나마 그것도 끝입니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기 전에 나오미는 장래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데, 자기 며느리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고 계획을 짰습니다.
한편 며느리 룻도 말은 않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비록 남자가 나이는 좀 들었지만, 평생을 과부로 살면서 시어머니 뒷바라지만 하는 것 보다는, 성품좋고 거기에다가 돈까지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결혼은 한쪽에서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룻이 원한다고 해도 보아스가 생각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혹은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고 싶다 할지라도 룻이 싫다고 하면 끝입니다.
한편, 유대 사람들의 풍습과 남자의 심리를 잘 알던 나오미는 타작하는 날 룻에게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보아스 잠자리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쉽게말해서 잠자는 외간남자 이불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정말 창피하고 외설스러운 부탁입니다.
이러한 외설스럽고 부끄러운 사건까지도 세밀하게 기록된 것을 보아도 성경이 얼마나 솔직하게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지 알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 사건은 세상적인 관념으로가 아니라, 예수믿는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타작 마당에 이렇게 하고 나가는 것은,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지옥불에 던져지거나, 성밖에 쫓겨나서 너무도 억울하여서 슬피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서는, 우선 목욕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이제는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몸에 기름을 발라야 합니다.
몸에 향수를 바르고 화장품을 바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부음, Anointing,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성경말씀을 읽고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끊임없이 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잊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시기를, 나를 만나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꼭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게되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힘들고 괴로운 이세상도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꼭 만나시는 체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행동하여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정직하고 진실되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대로 목욕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새옷을 입고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나갑니다.
성경은 룻이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말대로 다 했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룻은 마음이 착잡하고 만감이 교차되었을 것입니다.
모압에서 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때, 어린 나이에 유다에서 이민온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하였건만 결혼10년도 못되어 남편이 죽었을때 얼마나 절망스러웠던가,
그리고 가난에 찌들어 어떻게 살수가 없어 시어머니가 유다지방으로 역 이민을 갈 때, 따라오지 말고 모압에서 네 민족에게 재혼해서 잘 살라고 한사코 말리는 시어머니를 끝까지 우기고 따라와 남의집 보리이삭을 줏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리고 그 밭주인 보아스를 만났고, 오늘 밤에는 그의 이불속에 들어가 그에게 청혼을 해야합니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잠자는 외간남자 이불속에 들어가 결혼해 달라고 청혼을 해야하니, 룻의 마음은 얼마나 두근거리고 얼굴은 얼마나 화끈거리고, 다리는 또한 얼마나 후들거렸겠습니까?
이제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서 열심히들 일하고 나서 맛있게 밥을 먹으며 서로 잔을 주고 받을때 룻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한쪽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이불을 들고 그의 발끝에 누울 때 보아스가, “도대체 당신은 정신이 있는 사람이요?” 라며 거절을 하면 어떡하지? 그냥 여기서 포기해 버릴까? 라며 망설이며 가슴을 조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저녁식사가 끝나고 일꾼들의 일부는 돌아가고 일부는 그 타작마당 구석으로 가서 잠을 청하였습니다.
보아스도 기분이 좋을 만큼 취해서 자기 잠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의복을 만드는 천이 매우 귀하던 그 당시 겉옷이 밤에는 덮고자는 이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리라고 해 보앗자, 거적대기 펴고서 그 위에 누워서 낮에 입고 다니던 옷을 덮고 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타작마당에서 잠을 자는것은 낮에 타작한 것 도둑맞지 않게 지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집에 가 보았자 덥기만 하고 그러니까 타작 마당에서 그냥 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됩니다.
여하튼, 그날 밤에 타작 마당에서 잠을 잔 사람은 보아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오미는 이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아스가 어디에서 자는가를 잘 보아 두었다가 그리로 들어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엉뚱한 사람이 자고 있는 곳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말세에 적그리스도를 조심하라고 여러차례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보아스인줄 알고 그의 이불속으로 들어갔는데 엉뚱한 사람이었다면, 결혼은 커녕 폐가 망신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이 아직 밝을 때부터 보아스가 어디로 가는가를 계속해서 지켜보던 룻이 마침내는 슬그머니 나와서 보아스가 자고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보아스의 발 밑의 이불을 들고 들어가 누웠습니다.
여자가 자진해서 남자의 침실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남자에게 나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다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룻이 자기의 몸과 마음을 보아스에게 맡기고자 보아스의 잠자리에 들어가듯이,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문제해결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매주 주일 하루만이라도 주님 품안에 안겨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보아스는 낮에 종일토록 일했는지라 피곤하여 잠에 곯아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룻은 잠은커녕 엄청나게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8-9절에,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했습니다.
잠자다가 발끝에 뭐가 짚이는 것이 있어 깜짝놀라 깨어보니 웬여자가 자기 발 끝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 여자가,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자가 됨이니이다” 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라는 부탁입니다.
잠자다 말고 한밤중에 이 무슨 황당한 일입니까?
물론 룻이 현숙한 여인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여자의 몸으로 유부남 잠자리에 누워서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합니다 라고 하는 모습은, 아무리 시어머니가 시켰다고 는 하지만 말도 않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이불로 덮어줍니다.
잠언 10:12절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주느니라 했는데, 착한일 좋은 일 하는 사람은 칭찬해주고 어려운 사람만나면 덮어주시기 바랍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고 자꾸만 들춰내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다.
특별히 남의 말을 많이 하고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가정 불화가 심하거나 자신에게 아픈 상처가 많기 때문에,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아픈 것을 끄집어내고 긁어서 상처를 주게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남의 아픔을, 상처를, 허물을 덮는 것입니다.
노아가 대낮에 술을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고 잠을 잡니다.
이것은 노아가 대단히 부끄러운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아들 함이 자기 아버지의 이러한 흉몰스러운 모습을 보고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아버지의 흉을 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함의 형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와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쳐서 아버지를 덮어줍니다.
잠에서 깬 노아가 함을 어떻게 저주합니까?
함의 맏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으리니 그 형제의 종이 되어 섬기리라.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의 저주가 그대로 임하여, 가나안 족속이 셈족속을 섬겼지 않습니까?
허물을 덮어주는 자가 복되며, 큰 일을 할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합니다.
사랑이 많은 자는 이웃의 많은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남의 허물을 보면 아무리 호기심이 나더래도 들추지 마시고, 보아스처럼 덮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룻의 구혼에 보아스는 13절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찌니라”
이 짧은 구절에 “책임” 이라는 단어가 무려 4번이나 나옵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좋은 점이나 예쁜것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아픔도 그리고 약점이나 단점까지도 사랑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 사람의 인생도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녀관계가 좋게 시작되었다가 좋지않게 끝나는 것은 왜그렇습니까?
서로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물론 룻이 결혼해 달라는 것이 전혀 무리한 요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꼭 룻에게 결혼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자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너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고 합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기 위하여 결혼을 원하는 룻의 태도에 감탄합니다.
룻이 지금 결혼을 원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좇아서가 아닙니다.
자기만 편히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기 남편, 몰락해져가는 자기 남편의 가문을 일으켜 세워보고자 함입니다.
보아스에게 자기와 결혼하여, 자기 시댁식구가 팔아먹은 전답을 다시 찾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룻의 요구에 보아스는 질투는 커녕 오히려 칭찬합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많은 부를 가진 자가 가난하고 비천한 여인을 돕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물질적인 희생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직위가 실추될 수있는 위험과 자기희생이 따를 수도 있게 됩니다.
하지만 룻의 그러한 마음을 안 보아스는 그녀를 돕기로, 이방 여인인 그녀를 자기 아내로 맞아드리기로 결심하고 약속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죄악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된 권세와 부귀를 다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죄인의 친구요 그들과 같이 먹고 마신다고 그 당시 지도층으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마태복음 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능력자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침부터 서두르고 그 일을 다 끝낼때 까지 쉬지 않았듯이,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까지 쉬지않고 일을 하십니다.
이제 결단의 시간입니다.
처음 말씀드린 대로, Richard Leider 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 인생 보따리를 끌러보면 아픔과 상처와 후회감으로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Repacking Your Bags 우리의 인생 보따리를 열고, 과거의 실패와 아픔과 설움은 물론 성공까지도 꺼내버리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 보따리를 쌓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아침에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들면서, 룻이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보아스와 결혼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듯이 이제부터는 주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새로운 각오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룻이 보아스에게 체면도 자존심도 다 버리고 자칫하면 창녀 취급을 받을 위험도 있으면서까지 이렇게 적극적으로 매달립니까?
그녀에게 보아스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에서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오늘 밤에 놓치면 이제는 이러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을 그녀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찬식을 할 터인데, 떡을 받고 잔을 비우면서 오늘 이 시간 주님께 나의 삶을 온전히 맡기겠습니다 라는 결단을 하실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