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08
하나님의 열심(룻기 4:1-08절)
May 24/2009
어제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뉴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극복하기 힘든 고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지금까지 많은 험난한 고난을 잘 극복해 왔습니다.
가난해서 대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상고를 졸업하여 군에 입대한 후에, 제대한 후 고시 공부를 하여 판사가 됩니다.
하지만 곧 사표를 내고서 변호사로 길을 돌렸고, 노동자와 함께 하면서 정부와 회사들을 상대로 투쟁의 길을 걷다가 정치에 입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거에 당락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는 최고의 통치자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임기 초기 때부터 학벌과 시골스러운 모습과 말투에 시달려 왔지만, 권위주의와 재벌들의 횡포를 무너뜨리면서 정국이 혼란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돈없고 권력없고 연줄없는 서민들에게는 새 희망으로 떠 올랐습니다.
하지만 공명정대와 도덕성을 강조해오던 그가 친한 친구로부터 받은 금품이 뇌물로 인정되면서 고통과 번뇌속에 신음하다가 마침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고뇌, 고난, 고통, 아무도 피할수도 면역이 될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리고 그 고난을 이기고 일어서는 근본 열쇠는, 그 고난에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만약 그 분이 예수님을 알았고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면서 그렇게 비참하게 생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급하면 목사님을 불렀을 것이고, 기도의 동역자를 불렀을 것이고, 기도원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일이고 금식하면서 메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담배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섰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누구나 다 힘든 때입니다.
저 역시도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아직 그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오늘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내일을 꿈꿀수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꿈이 있기에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있게되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이 설정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안에서 힘을 내십시다.
오늘 본문의 룻이나 나오미 역시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들 역시도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길을 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일 매일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남의 밭에서 겨우 보리이삭이나 주워먹고사는 신세였지만, 그들은 신세타령하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추수가 끝나고 타작하는 날 밤, 보아스 라는 그 밭 주인 남자와 결혼을 하고자 서둘렀습니다.
룻은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고서 타작마당으로 내려갑니다.
.한편 밭 주인 보아스는 타작한 곡식을 지키며 일꾼들을 감독하느라 집에 들어가지 않고 타작 마당에 자리를 펴고 잠을자러 들어갑니다.
룻은 다른 사람들 눈치채지 못하도록 밤이 좀 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가서 자고있던 보아스의 이불을 들치고 들어갑니다.
한편, 보아스는 한 밤중에 몸을 뒤치닥 거리다가 발끝에 웬 사람 같은 것이 닿습니다.
자기 이불속에 웬 사람같은 것이 누워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순간 도둑이나 강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당신 누구냐” 고 묻자 “난 룻입니다,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결혼해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잠자다가 웬 날벼락입니까?
보아스는 참으로 난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모습으로 이해를 하여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은 나면 이윽고 죽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9: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했듯이, 한 번 죽으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듯이 심판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서기 전에, 목욕을 하듯이 나의 죄를 자복하고 진정한 회개를 하고,
기름을 바르듯이 성경 말씀을 읽고 늘 주님의 임재하심을 알고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이며, 우리의 사용하는 단어와 행동 역시도 바르고 의로운 행동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보아스는 나오미의 예언대로 이 문제, 즉 룻의 미래를 위하여 날이새자 즉시 성문으로 나아가 장로회를 주선합니다.
그가 그 성읍 장로회를 주선한 것으로 보아, 그 자신이 아마도 장로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며, 그의 인품이나 부로 보아서 혹 장로회의 회장이 아니었나도 생각이 됩니다.
그 당시 장로는 오늘날 교회에서의 장로가 아니라, 그 도시의 유지이자 지도자입니다.
장로는 재력과 인품이 겸비된 자로서, 자기가 사는 성읍에서 존경을 받았으며 성읍을 치리하는 중대사를 이 장로회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 역시도 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이러한 전통을 생각하여 재덕을 겸비하고 나그네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자를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법에 대하여 잘 알아야지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빈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하여 우리 말로 “희년” 이라 번역된 Jublee 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희년은 일곱번째 안식일을 주장하는 49년 째를 의미하기도 하고, 일번째 안식년 다음해로 하여 50년을 희년이라고도 하는데, 이 희년이 되면 팔아 먹었던 토지도 되돌려 받고, 빌어썼던 빚도 다 탕감받고, 돈 때문에 자기 몸을 저당잡혀 노예가 되었어도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전답이나 노예를 사고 팔때에, 영구적으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이 50년 사용권한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건물을 지으면 100년 후에는 그 건물이 땅 주인에게로 가는 제도가 있는데,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희년” 제도에서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나오미 가족도, 오래전에 모압으로 이민을 갈때 팔아먹은 논밭이 있었는데, 누구든지 나오미와 결혼을 하면 그 전답을 되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답을 살때, 제 값을 다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50년에서 나오미가 팔아먹은 햇수를 감한 나머지 햇수에 대한 대금만 내면 됩니다.
그러므로 당시 시세보다 훨씬 싸게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오미가 20년 전에 그 전답을 50만 불에 팔아 먹었다면, 이미 20년이 지났으므로 살때에는 30년어치 값, 약 30만불만 주면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아스는 장로회를 열고, 자기 친척에게 이러한 조건인데 나오미를 아내로 맞아 드리겠느냐고 묻습니다.
4절에,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 고 대답합니다.
보아스의 친척은, 얼른 생각할 때, 나오미는 이미 나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미 덕에 그 전답을 싸게 살수있고, 나오미가 죽고나면 더이상의 자녀가 없기 때문에 그 전답은 자동적으로 자기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미와 결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5절에,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하였습니다.
나오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오미의 아들의 아내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오미와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며느리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오미 뿐만이 아니라 룻의 생활을 책임져 주어야 하고, 그녀와 사이에 자녀를 낳으면 그도 책임을 져 주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6절에,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라고 포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포기한다는 증거로 신을 벗어서 줍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신발을 벗는 다는 것은 가문의 치욕적인 수치였지만,
그는 돈이 아까워 그러한 수치를 자처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당신의 일 보다도 우리의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해 주십니다.
보아스는 지금 한참 타작하는 중, 정말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때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봄과 가을로 이른비와 늦은 비가 오는데, 이 시기를 맞추어 농사를 짓게 됩니다.
보리 추수를 얼른 마쳐야지 밭을 정리하여서 비가 오기 전에 씨를 뿌리게 됩니다.
더구나 추수가 늦어지면 실컷 농사지은 것 비를 맞히게 되고, 그러면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타작하려고 많은 일꾼들이 모여있고, 그들을 잘 감독하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도 타작 마당에 와서 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나게 바쁜 상황에서 보아스는 지금 다른 일 다 제쳐놓고 룻의 문제를 해결하려 장로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타작 끝나고 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예상대로 보아스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먼저 이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해 아침부터 서두릅니다.
타작한 곡식은 어떻게 되는지 큰 관심도 없는양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아침부터 서둘렀던 것입니다.
보아스의 입장에서는 지금 타작이 중요하였지만, 룻의 입장에서는 이 일을 빨리 결정지어야 마음이 안정됩니다.
얼마나 다급하였으면 잠자는 보아스의 잠자리에 찾아 갔을 것이며, 이미 일을 그렇게 저질렀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얼마나 조바심하고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보아스는 자기 입장에서가 아니라 룻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룻을 위하여 자기의 중대한 일을 뒤로 미루고 이일을 위하여 바쁘게 서두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때로는 기도가 더디 응답될 때가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기 전에 한치의 잘못도 남기지 않으려고 법적인 절차를 밟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간구함을 들어주심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고려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응답이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안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등, 나쁜 일을 놓고 기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어떤 때에는 기다리라 는 응답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 주면 교만해지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만한 때가 되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실때, Yes 는 물론 No 로 응답을 받을 때도 있고, Waite 로 응답을 받을수도 있음을 아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윗 왕도 시편 27:9절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라고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다음절에,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기도 응답이 늦어진다고 탄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때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고 우리 중심으로 일을 행하시듯, 우리도 자신만 살라고 하지말고 이웃의 아픔을 달래주고 가려움을 긁어주라 하십니다.
저도 이웃의 필요에 참으로 민감하지 못하지만, 힘든 이웃의 아픔과 가려움에 같이 기도하고 위로하는등 조금이라도 동참하도록 노력하십시다.
둘째, 눈 앞의 이익을 보지 말고 미래를 보고 인생을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작년에 “상도” 라는 드라마를 아주 의미 깊게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계속해서 돈과 명예를 쫓아가지만 다른 사람은 사람에게 투자를 합니다.
돈과 명예를 쫓아 간 사람은 권모 술수를 써가며 권력과 결탁하여 짧은 기간동안에 큰 부와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이익에 눈멀지 않고 정도를 걸으며 상인으로서의 올바른 도리를 지켜가는 사람은 때로는 상대방으로 부터 이용도 당하고, 한 때는 극한 어려움과 수치를 겪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결국은 어떻습니까?
눈 앞의 이익을 쫓아가던 사람은 결국 눈 앞의 이익 때문에 자기의 스승을 배반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관계도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사업도 망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도 망쳐버립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또한 상인으로서의 원리 원칙을 정하고 자신이 세운 원리 원칙을 준수하던 사람은 갖은 고난끝에 마침내는 큰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양반 자제도 아니고, 과거시험을 치르지도 않은 일개 상인이 일약 현감, 지금으로 말하면 군수정도의 벼슬까지 합니다.
그렇습니다.
눈 앞의 이익을 보며 좇아가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며 올바른 길을 걸으면 처음에는 더디고 힘들고 바보스런 느낌이 들지만, 그 길이 바로 축복받는 길이요 그 길이 바로 성공하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의 보아스의 친척은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아드릴 책임이 있었지만 눈 앞에 이익을 위하여 거절합니다.
만일 룻이 아이를 낳지 못할 만큼의 나이가 든 여자이었다면 아마도 그는 룻을 아내로 맞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여자 데려다놓으면 아이도 낳게 될 것이요, 그러면 그 아이는 자기 아이가 아니라 죽은 룻의 남편의 아이가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실컷 돈주고 산 전답이 그 식구에게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계산해보니 이것 정말 엄청난 손해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손해볼 일을 자처합니까?
그는 현실적으로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웃의 어려움이나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 눈앞의 이익만 챙기려 했기 때문에 그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도 없었습니다.
룻은 유다백성들의 무너진 신앙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여종이었습니다.
비록 이방여자에 그것도 돈없고 힘없는 과부였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택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그가 룻을 불쌍이 여기고 자기 의무를 다하여 그녀를 자기 아내로 택하였더라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 바뀌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대로 그를 칭송하였을 것이고, 성경은 보아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온통 그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눈 앞의 유익과 욕망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장로회에서 신발을 벗는 추한 가문을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여러분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여러분들도 싫어하며,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여러분들도 귀하게 여기는 삶을 사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재물을 얻기 위하여 직장도 다니고 사업도 하는등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눈 앞의 유익과 욕망을 추구하다 실패한 보아스의 친척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재물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버리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보아스 역시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하면서 흥겹게 먹고 마시던 사람이었지만, 그 이름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되어 길이길이 기억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보아스와 그의 친척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보아스의 친척은 세상적인 유익과 욕망으로 눈이 가리워져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세상속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중요한 타작도 뒤로 미루고 나설 만큼 하나님 우선순위로 산 사람입니다.
결단의 시간입니다.
룻처럼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는데, 때로는 나의 능력을 믿고 계산하는 신앙생활도 하게 됩니다.
보아스처럼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살기를 원하지만, 보아스의 친척처럼 실패한 적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좌절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극단적인 길을 걷지 마시고, 거기에는 용서가 있고 생명이 있고 자비가 있는 예수님 품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늘 충만이 임하시기를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