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7
하나님의 일꾼에게 주시는 축복(룻기 2:05-09절)
April 19/2009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우선 살길을 찾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마침 보리 추수가 시작된 때라고 하였습니다.
.들에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은, 곡식을 추수하다가 떨어뜨린 이삭이라도 줏을수 있으므로, 아무 먹을것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축복입니다.
물론 차고 넘치는 축복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는 결단코 굶주리지 않고 다 먹여주신다는 증거입니다.
.들에서 한참 보리 베는 것을 본 룻이, “어머니 제가 보리 이삭을 좀 줍고 오겠습니다 누구네 밭이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밭으로 가겠습니다” 라고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내 딸아 가라” 고 승락을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아무런 경제력도 없고, 가진것도 없는 나이든 시어머니, 오히려 자신의 짐이되는 시어머니를 깎듯이 공경하고 존중하는 룻의 효심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며느리를 나오미는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였겠습니까?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룻은 이삭을 줏으러 갔는데, 우연히도 그 밭은 나오미의 친척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침 큰 부자이면서도 인품이 좋던 이 밭의 주인 보아스가 일꾼들이 보리를 잘 베는지 감독겸 구경을 나왔습니다.
2:4절에,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일꾼들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일꾼들은 주인에게 또한 축복을 빌어줍니다.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 한 장면만 보아도 보아스의 인격을 짐작할수 있을 것입니다.
일꾼들이 성심껏 일하지 않았다더라면 보아스는 “요령 피우지 말고 일좀 잘해라. 너희들 품삯이 아깝다” 라고 고함을 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고약한 사람 같으면 일꾼들끼리, “주인온다, 다들 열심히 하는척 해” 하면서 힘내서 일하는 척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추수하는 것을 감독하러 나온 주인이나 밭에서 일하는 일꾼이나 서로 감시하고 눈치보며 속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칭찬하고 복을 빌어주는 관계니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 생명의 강 식구들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항상 서로 칭찬하고 축복을 빌어주는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5절에,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라고 묻습니다.
일꾼들 뒤에서 열심히 이삭을 줏고있는 젊은 여자 하나가 보아스의 눈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꾼들 중 십장격이 되는 사람에게, “저 여자 누구냐?” 고 묻습니다.
8절에 “나의 소녀들과 함께있으라” 는 내용으로 보아 그날 그 밭에는 여러 젊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룻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룻이 다른 여자들 보다 특별히 더 예뻐서 그랬을 것 같습니까?
물론 그럴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룻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 즉 Anointing 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로는 기름부음이라 번역된 Anointing 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임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Senstive 한 사람은 그것을 영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는 설명할수 없지만 왠지 그 사람에게 끌리는 것입니다.
룻에게 그러한 Anointing 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나 Anointing 이 있는 것입니까?
모든 믿는자에게는 Anointing 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큽니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깊은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구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Anointing 이 강합니다.
깊은 시련과 고난을 겪지 않고서는 혼신을 다하여 주님께 매달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룻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룻이 그날 그 밭에 같이 있었던 다른 여자들에 비하여 특별히 잘난 것도 없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여자들 보다는 훨씬 더 깊은 고난과 시련속에서 갈급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고 자기의 친정식구, 문화, 민족을 버리고 모압지방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그 먼거리를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구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더욱 간절했고 더욱 갈급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하여 축복을 주시려고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오직 룻이 보아스의 눈에 탁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왕에 신앙생활하는것, 룻처럼 목숨을 걸고 아주 화끈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피곤하다 바쁘다 핑계대고 형식적으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 눈에 쏙 들어오도록 아주 울며 불며 죽자사자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강한 주님의 Anointing 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축복을 받더라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님으로 부터 쓰임을 받더라도 미적미적하지 마시고 아주 화끈하게 쓰임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환에게 저 여자는 누구냐 고 묻자, 사환은,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라고 자세히 보고합니다.
그 보고내용을 보면, 첫째로, 나오미와 함께 돌아온 모압 소녀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로써,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있는 이 젊은 여자가 자기의 친척이요 또한 과부요 타국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째, 허락을 받고 이삭을 줍는 예의바른 자입니다.
룻은 무턱대고 남의 밭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삭을 줍기 전에 여기서 이삭을 줏어도 됩니까 라며 허락을 받았습니다.
비록 그 모습이 남루하고 타국인으로서 말도 서툴렀겠지만, 참으로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셋째, 시어머니를 돌보러 잠시 집에 다녀온 것 외에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주 성심껏 일하였습니다.
그러한 바쁜 가운데에서도 시어머니를 돌보는 효성이 지극한 자요, 이삭줍기 같은 아주 작은 일에도 성심껏 열심히 최선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꾼 책임자는 왜 이렇게 자세히 보고합니까?
룻이 다른 여자에 비하여 그만큼 성심껏 일했으며, 또한 주님의 Anointing 이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고자는 비록 이삭줍는 천한 모습의 룻이었지만 눈여겨 보고 어디서 온 누군가 까지도 다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보고를 다 들은후 보아스는 룻에게 말합니다.
8-9절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보아스의 이 짧은 몇마디를 통하여 하나님께 의지하고 나아가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위로해 주십니다.
지금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모진 인생을 고독하게 살아온 룻에게 보아스는 “내 딸아” 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9:22절에서 예수님은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 세상과 격리되어 절망가운데 고독하게 하루 하루를 지냈던 그녀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십니다.
주님의 따뜻한 그 한마디에 그녀는 지금까지 격리되어 사람취급도 못받고 살아온 그 한맺힌 서러움이 다 풀어지고 평안함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아스의 “내 딸아” 라는 이 한마디에 그간 고독하고 험한 삶을 살아온 룻은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희생하였다는 각오로,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온 룻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내 딸아” 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것보다 가슴 벅차는 일이 어디 또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을 “내 딸아” 부르신 주님,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딸아” 라고 부르신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내 사랑하는 딸아” 라고 부르십니다.
현실이 힘듭니까?
환경이 나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고 서럽게 합니까?
주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딸아, 내 사랑하는 딸아” 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음성, 그 사랑의 음성, 위로의 음성을 들을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주님은 들을 귀를 가지고 당신의 말씀을 들으라 고 하십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내 딸아 들으라” 고 합니다.
일 손을 멈추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잘 들으라 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열심히 일하는 것 보다, 열심히 보리이삭을 줍느 것보다, 자기 말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영적인 귀가 있어야 합니다.
흔히 기도는 유창하게 하고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 비추어 말씀을 드린다면, 내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보다 주님의 음성을 열심히 잘 듣는것이 더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주님의 음성을 잘 들을수는 없습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무엘 상 3:1절 이하를 보면, 어린 사무엘은 잠잘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그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제사장 엘리가 자기를 깨우는 줄 알고 엘리를 찾아 갑니다.
연속 두번을 그렇게 하다가, 세번째에는 제사장 엘리가 “주여, 내가 듣겠나이다 말씀하옵소서” 라고 가르쳐 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물론 단번에 들을수 있는 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신앙의 스승으로 부터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한 자기 감정을 토해내며 금식하고 자신을 괴롭게 하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은밀한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말세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주님께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 곁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보아스는 내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은혜를 베풀터니 다른 사람의 소유의 밭으로 옮기지 말라 합니다.
보아스는 무엇보다도 룻이 자기와 함께 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보아스는 룻에게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가 항상 당신 곁을 떠나지 않고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호세아가 바람난 부인을 데리고 와서 이제부터는 나와만 사랑하자 라고 부르시고 타이르는 것처럼, 주님은 항상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고 늘 주님과 함께 하면 주님께서도 보아스가 베푼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파격적인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변의 환경이 나를 좀 힘들게 하고 어렵게 만들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다 접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주님 곁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아닌 주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축복을 먹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넷째, 신앙의 동지들과 같이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고 합니다.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은, 혼자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 말고, 같이 모여서 신앙의 교제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친하게 지내라, 좋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라 는 명령입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도 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 사랑안에서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서 있지 못하면 다른 성도들과 올바른 교제를 나눌수 없게 되고 고립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의 그릇된 편견이 고쳐지고, 또한 주님과의 바르지 못한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임의대로 어디든지 다니지 말고 소년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즉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일꾼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줏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에도 모두 순서와 또한 각자가 맡은 임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것 내가 빼앗아서 하는것 아닙니다.
지금 이 일꾼들은 일선에서 주인을 위하여 보리를 벱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조심을 다한다 할지라도 흘리는 곡식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룻의 사명은 그 뒤를 좇으며 흘린 곡식을 줏어 네 창고에 채우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선에 나가서 열심히 전도하고, 많은 회중들을 놓고 전도집회 등을 하는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집회 한번 했다고 해서 그 동네 전체가 다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이 흘린 이삭, 즉 듣기는 들었지만 아직 결단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상담하여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역도 반듯이 필요합니다.
이 사역이 전도집회 하는 사역보다 성과도 적고 또한 훨씬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더욱 중요한 사역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생명의 강 교회도 이러한 이삭 줍기식, 상처받고 시험들고 낙오된 자를 구원하는 사역을 중점적으로 할 것입니다.
무조건 사람들만 끌어 오려는 사역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그의 삶이 변화되는 그러한 사역, 온전히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이 확신을 갖게 하는 사역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여섯째, 영적으로 재 충전하여야 합니다.
목이 마르거든 소년들이 길러온 것을 마셔라.
목마르거든 네가 물길러 가지 말고 이미 소년들이 길어온 것을 마시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주님의 사역을 하다가 지치고 힘들면 영적 고갈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기 전에 영적인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이미 주님께서 예비해 두시고서 필요한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누구나 영적으로 고갈상태에 빠질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스스로를 점검하며 재 충전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역에 필요한 것을 주님께서 다른 일꾼들을 통하여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에 빠지지 마시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우선 순위로 두고 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가정 문제도, 직장 문제도, 진로 문제도 모두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일곱째, 주님께서 사역을 훼방하는 자들로 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보아스는 소년들에게 건드리지 말라 고 명령합니다.
젊은 과부가 혼자서 일하다 보면 남자들이 희롱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보아스는 미리 경고를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방해꾼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사단의 훼방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통하여 훼방을 받을수도 있고 희롱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보호해 주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오늘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을 생각하며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면서,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항상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영적인 귀를 달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한눈 팔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께서 밑기신 사역에 전념할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은헤로운 교제를 나눌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고갈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주시는 새 술을 마실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모든 훼방이나 위협으로 부터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통성으로 하실 분들은 통성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