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7

예수님의 리더십

Posted by on May 27 2009 at 10:23 pm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나로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일찍부터 대학을 포기하고 상고를 택하였고, 고시를 통하여 법조계에 들어섰다. 그리고 자신처럼 힘없고 가난에 시달리는 노동자와 함께하면서 투쟁의 길을 걷다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그리고 당선과 낙선을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막상 최고의 자리에 오르자 모순된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보며 그는 번뇌하기 시작했다. 생존권을 위하여 “Your play is our death!” 라며 연못에 돌멩이를 던지던 소년을 향하여 항의하던 그가, 이제는 자신도 그 연못에 돌을 던지는 아니 돌을 던져야 하는 모순성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자신이 던진 돌에 맞아 신음하며 외치는 개구리들의 합창에 “그게 다 운명이야” 라며 그냥 넘길수 없었던 것은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마추어였다.

말투도 걸음걸이도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제국의 통치자가 아니라 촌부들과 농담을 나누며 시골 아낙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민초 아저씨였다. 정치 스타일도 요직 임명에도 뇌물을 챙기는데 있어서도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변명하는데 있어서 까지도 모든 것이 그저 서투르기만 하였다.

대통령은 국제 신사답게 이미지를 좀 고쳐야 한다는 측근들의 조언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 프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교양없고 촌티나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느냐 고 부끄럽다고 야유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생존방법이었고 그의 삶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무시했던 권력, 그것도 자신이 임명했던 권좌의 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그 칼끝이 자기를 향하자 스스로 목을 치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도 그렇게 서툴게 끝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연민의 정이 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를 좋아해서도 그를 존경해서도 그의 정치노선을 지지해서도 아니다. 그는 목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요 크리스천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내가 그를 닮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실수와 모순덩어리처럼 보였던 그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발견할수 있었고, 회리바람처럼 휘두르며 밀어부치는 비판의 중심에 서있는 그의 모습 속에서 나의 고통을 느낄수 있었다.

물론 그와 나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성취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있다. 그는 생사를 걸고 노력하고 투쟁하여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정복하였다. 하지만 그의 세계에는 능력과 노력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 사랑과 용서가 없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연구하여 해결될 문제 같았으면 그는 분명히 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죄의 문제, 특히 자신의 죄의 문제에 봉착하자 그는 당황 할 수밖에 없었고 아마츄어답게 옹색한 변명만 늘어놓다가 급기야 포기해 버린 것이다. 죄 문제는 누군가가 내 대신 지고가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투쟁하고 고민해도 가슴깊이 남아 계속해서 번뇌하게 함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갔다.

만약 그 분이 예수님을 알았고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그렇게 비참하게 생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급하면 목사님을 불렀을 것이고, 기도의 동역자를 불렀을 것이고, 기도원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몇일이고 금식하면서 메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한 까치의 담배가 아니라,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며 통곡했을 것이고 마침내는 다시 일어섰을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다 힘든 때다. 나 역시도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다. 아직 그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주저앉고 싶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가?  “남들은 지쳐 앉아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함께 계시잖아요” 라는 찬송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예수님 때문에 오늘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내일을 꿈꿀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일에 대한 꿈이 있기에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있게되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을 설정할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아가서 1:5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하였듯이 우리의 행실이 아직 검지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아름답다. 게달의 장막처럼 아무리 빨고 닦을 지라도 하얗게 될수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한점의 티도없는 솔로몬의 침실 커튼처럼 깨끗한 존재임을 굳게 믿으며 힘든 이 시기를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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