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13
작은 일에 충성하라(룻기 2:01-04절)
April 12/2009
룻기 1장은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로 끝나고 있습니다.
당장 끼니를 이을 것이 없었는데, 다행히 추수때에 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들이나 밭에 아무런 곡식이 없는 때에 왔더라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리 추수 시작때, 곡식을 추수할 때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나님의 때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하고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때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시기인 God’s Season and God’s Time 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와 룻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축복의 길을 열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2장은 1절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를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첫절에 보아스라는 사람이 소개되는데, 이처럼 새로운 장을 열면서 첫절부터 소개되는 이 사람은 장차 일어날 사건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아주 유력한 사람이자 큰 부자라 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부자이자 유력한 사람, 돈도 많은데 존경까지 받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인품이 매우 좋은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유대사회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부자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락 내리락 하며, 대부분 비판하고 헐뜯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은 부자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남의 돈 사기친 것이겠지.
.혹은 정부 관리와 짜고 돈 빼냈겠지.
.직원들 월급 안주고 세금 뗴먹었겠지.
이처럼 열심히 노력하거나 정당한 방법이 아닌 무엇인가 부당한 방법으로 모은 것이라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부자들이 이렇게 해서 부자가 된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사회 구조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단 시일 내에 큰 부자가 될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자가 베풀지 않으면 배 아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더욱 더 큰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자이면서 존경을 받는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람은 교양도 있고 베풀기도 잘하는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훌륭한 사람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입니다.
왜 무슨 이유로 여기서 보아스가 나오미 남편의 친족임을 언급됩니까?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북쪽에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에서는 “형사 취수”라 해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법이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는 제도인데,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본다면 괜찮은 사회제도중의 하나입이다.
지금도 힘드는데, 그 옛날에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과부가 더구나 딸린 자녀들까지 있다면 어떻게 무엇으로 생활해 나갈수 있겠습니까?
재혼을 하고 싶어도 그런 여자를 누가 아내로 맞아드리겠습니까?
더구나 젊지않은 과부라면 더더욱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과부들을 국가에서 다 먹여살릴만한 예산도 없었을 텐데.
그래서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여 형수에게 딸린 모든 식구들의 생활비를 책임져 주도록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제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도 이러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 죽은 사람의 형제 뿐만이 아니라 누구든 가까운 친척이 아내로 맞이하여 생활비를 대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전에 낳은 자녀들은 물론 새로 결혼하여 난 자녀들도 현재 남편에게 속하지 않고 모두 죽은 남편의 명의로 됩니다.
그리고 남편 생전에 가지고 있던 전답을 팔아 먹었으면, 그것까지도 돈주고 다시 사주게 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부된 사람의 생계를 도와주고 또한 죽은 남편의 대도 이어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맺어진 결혼을 단순한 혼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기업을 물게 하였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를 나오미의 죽은 남편의 친족이라고 소개한 것은, 나오미는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죽은 남편의 대를 이어 줄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자기 남편의 대를 이어줄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부자가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는 친척중에 이렇게 부자이고 훌륭한 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서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법으로 당신은 나의 남편되어 우리의 모든 식구를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리시오”라고 보아스에게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기대하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랐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것이지 친척의 도움을 바라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자들이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세상을 믿고 사람을 믿다가는 실망할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전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의 욕구나 필요를 채워주고도 싶지만, 친절하고 따뜻하게 해주고 싶지만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본의아니게 상대방을 실망시키고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사회적으로도 매우 천하고 경제적으로도 바닥을 기는 삶이었습니다.
무엇인가 다시 시작하고 싶고 일어서고 싶은 젊은 여자로서, 돈도없고 사회적 신분도 천하다는 것은 매우 견디기 힘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젊은 여자가 평생을 수절로 지내기란 예나 지금이나 매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여하튼 아무도 그녀의 생활을 책임져 줄 사람도 없었고, 농사를 지을 논도 밭도 없었습니다.
당장에 무슨 수가 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에 온 룻은, 1:16-17절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선포한 것처럼 아주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도 단호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각오도 없이 떠나온 것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따라,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함께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모압 국경을 넘을 때에는 그녀의 부모 형제 풍습, 종교, 그리고 그녀의 신분까지도 거기에 놓고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으면 나의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뿐만이 아니라 나의 성공이나 나의 신분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전의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철저히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게 맡기시거나 열어주시는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룻은 시어머니에게,“나가서 곡식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녀가 처음부터 그것을 생각한 것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이것 저것 먹고 살 궁리를 하다가, 그 상황에서 그 일이 최선의 길이었고, 또한 이방 여자로서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 밖에는 없었으니까 하는수 없이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밭에서 다 거두어 가고 뒤에 떨어진 것을 줏는데, 그것 줏어 보았자 얼마나 되겠습니까?
소출이 적었던 그 옛날에는 더 적었겠지만, 저도 농사를 지어 보았기 때문에 아는데, 하루종일 줏어도 많이 줏어 보았자 한두말 정도밖에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논을 살수 있겠습니까? 밭을 살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추수철이 끝나면 그나마도 더이상 할수 없습니다.
이처럼 이삭줍기란 당장 끼니가 없는 사람들이 그저 연명해 나가는 방법이지 전혀 장래성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룻은 이 작은 일에 충성하였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하찮하고 장래성도 없는 보잘것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라 여기고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더욱 큰 축복을 주신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14-23절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하였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 작은 일을 맡겨 보십니다.
그리고 그 일에 충성하는지 아니면 작은 일이라고 흐지부지 하는지를 살핍니다.
그랬다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더 큰 축복도 주십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5:24-30절에,“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은 자에게는 큰 일을 맡기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맡겼던 것 까지도 책망과 함께 빼앗기게 된다는 경고이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자는 큰 일을 맡겨도 제대로 해낼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시는 일이 작은 일처럼 여겨질지라도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여러분들의 태도를 지켜보십니다.
큰 것만 바라면서, 왜 나에게는 큰 것이 오지 않는가? 라고 한숨짓지 마십시오.
작은 일을 충실히 잘 해낼때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네게 더 큰 이릉ㄹ 맡기리라 하시며 더 큰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우리 생명의 강 교회를 시작하면서, 최선을 다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엎드려 기도하다가 그대로 잠이 드는 때도 있지만 매일 4:30분에 일어나 새벽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수요예배 또한 목요기도모임도 갖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충실할때 하나님께서 더 큰 무리를 보내 주실 것으로 믿고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 3-4절에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룻이 보리이삭을 줏으러 갔는데, 우연히도 그 밭은 보아스의 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따라 밭 주인 보아스가 그 밭에 나와 본 것입니다.
밭 주인 보아스는 항상 밭에 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밭이 여러개 이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나 어쩌다가 한번씩 오는데, 그 날은 하필 룻이 보리이삭을 줍는 그 밭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인사하며 그들의 축복까지 빌어주는 친절하고도 인품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에이든 토저(A.W.Tozer) 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우연은 없습니다.
이미 약속된 걸음만 있을 뿐입니다.
2절에, 룻이 보리 이삭을 줏으러 갔는데, 가기전에 무어라고 합니까?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보리 이삭을 주으러 가는데 나로 하여금 그 밭에서 은혜를 입을 만한 밭으로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녀를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또한 며느리를 일터로 보내는 나오미는 집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을 까요?
아니면 낮잠이나 쿨쿨 자고 있었을 까요?
아니면 요샛말로 연속극이나 보고 세월보내고 있었을 까요?
뉴욕에 계시는 저희 어머님도 저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생명의 강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나오미 역시도 며느리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일터로 가기 전에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지요?
룻이나 나오미는 자기의 일터, 즉 직장으로 가기전에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도의 응답이지 우연이 아닙니다.
토저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안에 사는 우리에게는 우연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만남도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신 필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만남에 반듯이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려 드리는, 즉 하나님을 위하여 큰 일을 하도록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의 만남도 하나님의 계획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까 이렇게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큰 사역을 준지해 놓으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만남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필연적인 만남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진정한 의미, 오늘 나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사신것, 그게 전부입니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유한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서 매일 매일 근근히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작은 일에 매일 충성한 댓가로 후에 보아스의 신부가 됩니다.
그리하여 더이상 매일 먹거리를 위하여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지 않아도 됩니다.
보아스와 함께 보아스가 누린 축복을 룻도 그리고 지금까지 도와 주었던 나오미도 같이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비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들이 지금 하시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직장생활이든, 이웃을 돕는 사역이든, 사업이든, 공부든 무엇이든지 간에, 그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명을 충실히 잘 이행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참된 신부가 되는 그 날에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누리시는 축복과 권세를 같이 누리며 같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