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01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룻기 1:11-18절)

Posted by on Apr 01 2009 at 08:16 pm

March 22/2009
지금까지 우리는 나오미 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들었습니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말미암아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좀더 잘 살아보고자 나오미 가족은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자로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내가 부자가 되면 이웃에게 크게 베풀면서 살리라 라며 다짐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이러한 선한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는 복을 당장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오미 역시도 왜 그런 생각을  안 해 보았겠습니까?

.나오미 가족은 좀더 부자로 잘 살아 보려고 멀리 타국에 까지 이민을 갔는데, 거기서 남편이 죽었습니다.
.말설고 물설은 타향에서 남편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기둥같은 남편은 어린 것들을 남겨두고 훌쩍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을 아주 강하게 먹고, 어린 두 아들에게 온갖 기대를 걸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아들들 마져도 자식하나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됩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도 기가 막히고 고통스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처음에는 큰 부자가 될 마음으로 희망에 부풀었던 그 땅이, 이제는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저주의 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이민이라는 기가막힌 결단을 하게 됩니다.
.말이 역이민이지, 남편도 자녀도 모두 다 잃고 빈털털이로 돌아간다니, 이 무슨 꼴입니까?
그래도 전에는 동네 유지로서 인정받고 살았는데, 이제는 가문의 씨도 마르고 재산도 다 망해버린 처지에, 무슨 낯으로 동네사람들을 볼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치부를 드러내는듯한 수치스러운 일인줄 알면서도, 오죽했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겠습니까?

.누가복음 15:11절 이하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용단을 내리기 전,“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라고 자꾸만 중얼거립니다.
.단번에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왜 그렇게 자꾸만 중얼거립니까?
.가출할 때에는 한 밑천 가지고 보라는 듯이 박차고 나왔는데, 알거지가 된 처지에 무슨 낯으로 돌아갑니까?

.초등학교만 마치고 무작정 상경하여 서울에 사는 제 초등학교 친구들이 몇 됩니다.
그런데 명절때가 되어도 하나같이 고향에 내려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수퍼마켓이나 식당에서 잔심부름 하면서 겨우 먹고 자는 신세였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오고 싶어도 차비도 없고, 또한 고향 친구들에게 그러한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고향 산천이 그립고, 부모님도 보고싶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지만, 갈수없는 신세, 다들 고향에 간다고 들떠 있을때, 골방에서 한숨지었을 그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시립니다.

.아버지 집을 박차고 나와 무작정 상경하여 알거지가 된 이 탕자, 이 거지같은 초라한 모습, 이 모습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싫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지, 자존심 체면 지키려다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는수 없이 아버지 집으로 가겠다는 용단을 내리기까지, 몇날 몇 일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는 것입니다.

나오미 역시도 하루 이듵 고민하여 결정한 것이 아니라, 몇날 몇일을 기도하는 가운데 고심한 끝에 결단을 한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가지는, 룻기 1:20절에,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고 한 것처럼 나오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불행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참을수 없고 견딜수 없는 고난이 닥치자, 하나님게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좀 더 잘 살아보려고 하나님을 떠나 이방땅으로 이민을 간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죄인가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또 다시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무슨 큰 꿈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자신이 당한 고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라는 깨우침이 있었기에 그녀는 고향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모든 것을 체념한체 두 며느리들을 데리고 유다지방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과부 셋이서 개나리봇짐 하나씩 머리에 이고서 패잔병처럼 터턱 터덕 청승맞게 베들레헴을 향하여 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처량한 모습으로 한참을 걸어 오는데, 갑자기 이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유다로 돌아오는 것을 결정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자신과 자기 며느리의 입장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이 며느리들은 외국으로 이민을 가는 처지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늙어서 이렇다 할 꿈도 없고, 남자에 대한 미련도 없습니다.
하지만 과부가 과부의 사정 안다고 하듯이, 한참 젊은 나이의 며느리들은 다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노상에서 아주 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너희들은 참 착한 며느리들이다.
.네 남편들에게도 그렇게 잘 하더니, 남편이 죽고 없어도 이 늙은 시애미를 무시하지 않고 계속해서 잘 대우해 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날 따라와 보았자, 평생 과부로 살아야 할 뿐 아무런 희망이 없다.
.그간 우리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엄청하였고, 남편잃은 설움과 외로움속에 살아왔는데, 이제는 재혼하여서 잘 살아라.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축복기도를 하여 보냅니다.
아마도 이 말을 하는 나오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을 것이고, 서러움에 목소리도 울며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 착한 두 며느리들은 소리를 높여 울며,“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 도움을 줄수 없으니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같이 있어야 한다는 노상에서 벌어진 이 가슴아픈 실랑이,
세 과부의 초라한 이 모습, 누구를 원망할 수도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 수도 없고 그저 자신들의 신세가 너무도 처량하여서 서로 부등켜 안고 목놓아 울어대는 이 모습, 정말 비극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자들에게는 오늘의 눈물이 내일의 축복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오늘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 주님은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축복으로 갚아 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며느리들이 그래도 따라오겠다고 울며 떼를 쓰자, 나오미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11-13절에,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라고 합니다.

.형사취수라고 우리나라 고대에도 부여에도 있었던 제도인데, 유대인들에게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아 형수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나오미가 살아있는 아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남은 아들이 하나도 없고, 설령 지금 결혼을 한다할지라도 이미 늙어서 아이를 낳기 힘들 것이며, 만의 하나 지금당장 아들을 낳는다 할지라도 어느세월에 그 아들이 커서  너희들의 남편이 되겠느냐 라고 나오미는 말린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죄를 져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셨는데, 그로 말미암아 우리 집에 시집온 너희들도  엄청난 고난을 겪는것을 보니 내 가슴이 참으로 아프다.
그러니 이제는 제발 우리 집 따위는 잊어버리고 재혼하여 잘 살아다오 라고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오미의 신실한 호소를 들으며 두 며느리는 크게 목놓아 웁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했습니다.
오르바는 룻과 마찬가지로 나오미의 집, 즉 유대인에게 시집온 모압 여인입니다.
그러므로 시집올때 유대교로 개종했을 것이며, 유대인의 풍속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각오도 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오르바 역시 룻 못지 않게 남편도 잘 섬기고 시어머니도 잘 섬겼습니다.
.그리고 룻처럼 남편을 일찍 여읜청상과부입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섰을 때 룻처럼 오르바 역시도 시어머니와 함께 유다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오르바나 룻이나 겉으로 보아서는 행동이나 신앙에 거의 다른 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현실을 생각하라, 장래를 생각하여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간곡한 부탁과 권유로 하는수 없이 발길을 돌립니다.
.그렇다고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돌아가는 오르바의 발걸음이 어떻게 편할수가 있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상황으로 보아, 오르바는 정말 심성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시어머니를 떠나오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오르바는 룻과는 달리 모압, 자기 민족에게로 돌아감으로써 룻과는 아주 엄청나게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르바와 룻은 무엇이 왜 어떻게 달랐기에, 한 사람은 어느정도 따라오다가 오지 말라고 하니까 되돌아 갔고 또 한사람은 끝까지 고수하게 됩니까?
.오르바와 룻은 같은 처지에서 같이 살았으면서도 무엇이 달랐기에, 그들의 운명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랐습니까?
.무엇이 달랐기에 한 사람은 예수님의 가문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까?

.우선 신앙의 깊이가 달랐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장래의 삶을 놓고 결정을 내리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오르바는 자기의 미래를 내다 보면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현실적인 유익을 먼저 택하게 됩니다.
그녀가 신앙이 전혀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지만, 현실 문제에 부닥칠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논리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오르바가 생각할때, 시어머니를 따라 가 보았자 평생을 가난한 과부로 마친다는 것 밖에는, 다른 답이 안나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예 이러한 현실을 모르면 따라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늙으신 시어머니 모시고 아무런 욕심 없이 살다가 죽고 싶지만, 그렇게 살기에는 자신의 젊음이 너무 아까웠던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너무도 큰 희생이요 미련한 짓입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가슴아프고 시어머니에게 미안하지만, 하는수 없이 냉정을 되찾아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시어머니의 그러한 권유도 있었으므로 자기 결정에 대하여 얼마든지 정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르바는 신앙때문에 힘들게 이방인으로 살기보다는 편안한 부모형제의 품 안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체면상 그리고 양심상 따라갔지만, 중간에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지만, 그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만 중대한 결정을 할 때에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아닌 현실적인 결정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계산을 하는 신앙. 그리하여 신앙생활이 자기의 삶이나 Business 에 이득이 된다고 여겨지면 아주 아주 적극적이다가도,
나의 유익에 상반되면 하다가도 중단해 버리는 것이 오르바의 신앙이자 우리의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전서 13:5절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듯, 신앙은 이러한 자기유익을 찾는 본능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산적인 신앙을 버려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떠한 유익을 바라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나 욕심이나 감정을 죽이기 위하여 주님만을 바라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이나 물질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에서 눈을 돌려 예수님을 보고 따라가는 절대적인 길입니다.

이처럼 룻과 오르바의 차이는 미모나 능력이나 가문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니를 끝까지 잘 모시는 효성의 차이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행위는 눈 앞의 이득만을 바라는 투자가 아닙니다.
Beauty and Beast, 즉 미녀와 야수 의 동화에서도 볼수 있듯이, 미녀가 야수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야수가 가지고 있던 호화로운 저택이나 재산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늑대에게 물리고, 또한 자기 때문에 정적에게 찔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미녀는 야수에게 진정한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되지 않습니까?

믿음생활이라는 것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나의 하나님을 위한 희생, 적당한 정도 것의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희생의 행위를 보일때 주님은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르바처럼 하나님도 섬기며 나름대로 자기 살길을 준비하는 신앙이 아니라,  룻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드리는 신앙을 원하십니다.

둘째로, 사생 결단을 내리는 믿음의 행위가 오르바에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16-17절에,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어머니와 동행하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길, 그 옳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시어머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난 무슨일이 있어도 어머니와 같이 가겠나이다 라고 아주 결단을 선포합니다.
이처럼 그 길이 옳은 길인줄을 알았으면, 거기에 따르는 희생적인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그 길을 택하여 가는 용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를때 요한이 옆에서 따라오자 베드로가, “저 사람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다른사람 쳐다보지 말고 너는 나를 따라오라 고 책망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체면이나 사회적인 위치때문에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신앙이 아니라, 옳은 길을 택하여 나아가는 결단의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룻은 함께 살고 함께 죽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17절에,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였는데, 사람이 죽기로 결심하면 무서울 것이 없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룻은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지만, 신앙을 위해서는 아주 지독한 여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아주 강하게 독하게 먹어야 하나님을 따를 수 있고, 그래야지 더 큰 축복을 받을수 있게됩니다.
믿음의 길,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은 대충대충 따라가는 길이 아닙니다.
가다가 쉬는 길도 아니요, 힘들다고 뒤돌아 가는 길도 아닙니다.
사생 결단을 하고서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결심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결단하셨습니다.
사탄은 그 고통을 왜 지느냐고 유혹하였고,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으면 주님도 이 잔을 이 고통의 잔을 피할수 있다면 피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애원하십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며 결단을 하십니다.

바울사도께서도 빌립보서 1:20-21절에,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순교의 결단을 내리십니다.

지금은 사순절 고난 주간입니다.
주님의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시려고 치르셨던 엄청난 고난의 결단, 목숨을 내놓는 결단을 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도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룻은 믿음의 공통체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믿음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하여 용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제 남편이 죽고 없으므로, 율법적으로는 그 가정에 더이상 몸 담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인간적인 관계를 내세워 돌아가라고 하지만, 룻은 어머니와 나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공동 운명체입니다 라는 의식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나는 이미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이 공동체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더이상 만류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한다면,  내가 어머니를 위하여 내 인생을 희생하는 것으로 생각하시고 미안해 하시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 나의 헌신입니다 그러니 더이상 막지 마시옵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나오미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18절에,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더이상 고부간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를 위한 일임을 보고 나오미도 더이상 막을 명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결단의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 부류의 믿는자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나오미와 같은 이성적인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신앙의 경륜도 있고 성경 지식도 많고 체험도 많아서,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권면도 하고 가르치기도 잘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중대한 결정 앞에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길을 택합니다.
또한 극단적인 자기희생을 피하고 언제나 중도를 지키며 대세를 따라갑니다.
이렇게 하면 상처도 덜받고 주변사람들로 부터 존경이나칭찬을 받을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영향력이 있기 떄문에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킬수 있습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의 권유를 받아드려 친정으로 돌아가는, 우상숭배의 길로  빠져버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길을 택하였습니다.
하지만 만일 나오미가 같이 가자고 권유를 했더라면, 오르바 역시도 베들레헴으로 갔을 것이고, 룻 못지않은 축복을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나오미는 오르바를 돕는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오르바의 생명을 살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오미를 비난할수 있습니까?
.이것은 나오미만의 실수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믿는자들이 늘 겪는 실수가 아닙니까?

 

.두번째 사람은 오르바와 같은 미지근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오르바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따르지만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줄수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엄청나게 바라면서도, 그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자기 희생이나 열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착한 크리스천이지만, 심각한 문제에 부닥치게되면 신앙은 차선이고 자기경험과 논리에 의존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3:18절 이하의 4가지 밭의 비유에서처럼, 이런 사람들은 두번째 와 세번째 밭, 돌밭과 가시덤불 밭에 비유가 될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은 상호적인 것 아닙니까?
짝사랑은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이요, 결국은 실망과 비극을 낳게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짝사랑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 되고, 결국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지 않으면 주님도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시록 3:15-16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고 경고 하셨습니다.
이왕에 주님을 알았고 예수 믿기 시작하였으면, 미적거리지 마시고 화끈화게 믿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하여 주님의 화끈한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룻과 같은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룻은 결단하는 신앙이요, 목숨을 건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환경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요, 계산해보고 가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목숨을 걸고 나아가는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떠한  댓가를 축복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절대적인 신앙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이제 눈을 감고 가가 자신을 돌아 보십시다.
주님이 보실때 나는 위의 세 사람중 누구의 신앙에 속하는 사람인지, 혹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았다면 어떤 신앙인지 생각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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