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01
예수님의 리더십
얼마전에 보았던 백제의 무왕과 신라의 선화공주의 사랑을 엮은 “서동요” 라는 드라마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역사적인 사실성에 대하여서는 논란이 있을수 있겠지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남녀의 사랑이나 역사적 진위가 아니라 등장하는 왕들의 리더십이었다. 특히 법왕으로 등극하는 부여선과 그 뒤를 잇는, 후에 무왕으로 등극하는 서동과는 왜 무엇이 어떤 점이 다르며 또한 왜 그렇게 되어져 가는가를 설명하는 과정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되었다.
부여선이나 서동 모두 백성들의 반응에 민감하였다. 아무도 백성들의 신임이 없는 왕은 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선정을 베푼 왕으로 길이 역사에 남기고 싶은 본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조카였던 부여선은 이미 장성한 왕의 직계아들들이 있었으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를 기회는 거의 없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고 싶어하는 욕망은 그를 셀레이고 갈등하게 만든다. 그는 날마다 어떻게 왕위에 오를까에 집념하게 된다.
한편 자신이 정통성이 있는 태자임을 알게된 서동은 어떻게하면 백성들을 등다숩고 배부르게 할 것인가, 소위 말하면 경제발전과 통치철학 개발에 몰두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왕위에 오르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라고 하여 방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여러번 목숨을 걸고 숨막히는 싸움을 하게된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싸우는 싸움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지도하기 위하여 필요한 권위(Authority)와 책임(Responsibility)을 부여받기 위하여 거쳐야 할 불가피한 과정으로 받아드린다.
하지만 부여선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목표였다. 일단 왕위에 오르고 보면 일이 잘 풀릴 것이며, 나머지 문제는 그때가서 생각하자는 것이다. 물론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준비성이 결여된, 나쁘게 말해서 그는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였다. 그는 자기 앞 길을 막는 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하였으며, 자신의 왕위를 위하여 귀족들과 결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귀족들의 힘을 이용하여 선왕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후 귀족들을 어떻게 설득하여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자기의 설득과 협박으로 선왕을 배신하고 자기를 따랐던 귀족들이, 후에 자기가 왕이 되었을 때에는 자기의 숨통을 조여올 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귀족들이 자기를 좋아해서 따르는 줄 알았는데,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자신을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 것을 깨닫고 분노한다. 귀족들이 자기를 왕위에 앉히기 위하여 선왕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귀족들은 원래 왕의 목을 조이는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며 복수를 노리지만, 결국 귀족들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변신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신세를 이렇게 탄식한다, “아좌태자는 어떻게 다스릴까를 생각했었는데, 나는 어떻게 그 자리를 오를까만 생각했다. 이것이 이미 가진자와 그 자리를 빼앗아야 하는 자의 차이다” 얼마나 가슴아픈 현실인가?
그런데 시대와 명칭만 다를 뿐이지 오늘날의 정치문제나 교회문제와 똑같지 않은가? 정당한 과정을 거쳐 자리에 오른 자는 그 위치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발전시킬까에 주력하게 되는데,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빼앗어서 오른 자는 불안한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그 위치와 권한을 오용하고 악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아닌가?
확실한 소명으로 자리에 오른 자는 어떻게 그 소명을 이룰것인가에 주력하게 되며, 그 소명을 위해서는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는 각오를 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야망이나 욕심으로 오른자는 자기보다 정당한 자가오면 물려 주어야 하는 불안감에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한 확실한 소명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위험이 닥치고 어려움이 닥치면 피할 궁리부터 하게될 것이다.
억지로 왕을 시키려는 백성들의 의도,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구발산과 자기들의 적을 쳐서 대리만족을 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미리 아신 예수님은 그들을 설득시키거나 아무런 권면도 하지 않으시고 그 자리를 피해 버리셨다. 예수님은 백성들이 추대하지 않아도 이미 왕이셨고, 그들이 원하는 왕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으실 준비가 되어있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또다시 부여선의 탄식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아좌태자나 서동처럼 준비된 사역자인가 아니면 부여선과 같은 사람인가? 내가 서있는 이 자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인가 아니면 나의 노력으로 오른 자리인가? 이 고난주간 동안, 주님께서 내게맡긴 양들은 나의 사랑과 희생을 쏟아놓을 대상인지 아니면 나의 꿈을 이루어주는 수단으로 여기는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확실한 답변을 할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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