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05 2010

에베소서(1장 01-02절)

Published by Jin Kim under 에베소서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使徒)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聖徒)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信實)한 자(者)들에게 편지(便紙)하노니    Paul, an apostle of Jesus Christ by the will of God, to the saints which are at Ephesus, and to the faithful in Christ Jesus:

오늘 본문 1-2절은 로마의 감옥에 수감된 바울 사도께서 당신께서 개척하시고 시무하셨던 에베소 교회에 보내신 옥중서신입니다.
기독교가 공식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던 그 당시 바울사도께서는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을 다시시면서 선교사역을 하시다가, 루디아처럼 복음을 받아드리는 자가 있으면 그 집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도 에베소에 있는 몇몇 가정교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에베소서는 그 가정교회들이 서로 돌려가며 읽어 보라고 보낸 서신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교회 밖에있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올바른 교회생활을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볼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이 에베소서 외에도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고린도 전후서등 여러개의 서신을 쓰셨는데, 대부분의 바울사도께서 보내는 서신의 서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으로 시작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의 뜻” 이 자주 강조되고 있으며, 이 단어는 다른 어떤 성경보다 에베소서에서 더욱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뜻” 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 것은, 자신의 의도나 자신이 원하여 구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1절도,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도로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사도로 세우셨기 때문에 사도가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께서 유독히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사도가 된” 이 말씀을 강조하십니까? 물론 “다메섹에서의 체험” 처럼 그 분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기인한 것도 있겠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12 제자만을 사도로 칭했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도 그 분들에 비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 엄연한 주님의 사도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란 무엇입니까?
사도란 헬라어로 Αποστολοσ 이라해서 목적을 가지고 ”보내심을 받은자”, 심부름꾼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사도란 예수님과 공생애를 같이한 12 명의 제자를 지칭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사도라하면 직책뿐만아 아니라 특별한 권한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도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임을 자신있게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2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그들과 동등한 권한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권한은 인간이 부여해서됨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여받았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바울 서신의 서두에는 자신이 당당한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밝히고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도의 개념은 예수님의 12사도는 물론 우리 믿는 자들을 모두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예수를 믿고 성령 충만함을 얻었으면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보내진 선교사, 예수님의 사도라는 사명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에베소에 있는 성도(聖徒)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信實)한 자(者)들에게 편지(便紙)하노니  하였는데, 성도를 우리 안에 거룩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자 Saint 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모든 크리스천들을 Saint 로 부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연고로 우리들의 삶도 거룩한 삶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이라는 뜻은 거룩하지 못한 것과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삶이란 거룩하지 못한 세상적인 삶과 구별된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챤들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하는 이중적인 신분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동안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으로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의 육신은 세상에 살고있지만 우리들은 세상사람들과 구별된 생각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 “그리스도 안에있는 자”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있다 는  자신의 신분과 또한 그 안에서의 하나됨이라는 Unity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에베소서의 가장 핵심적인 용어로서, 자그만치 36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있는 자” 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자” 라는 의미로써 아직 예수를 믿지않는 “그리스도 밖에있는 자” 와 철저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공동체의식을 강조함으로써 그 안에서 서로 공유하고 나눌 수있음을 암시합니다.

2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평강(평화)은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평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세상이 환경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 환경에서 오는 평화는 꿈을 꾸는 것 처럼, 그리하여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사라져 버리는 듯한 순간적인 것입니다. 그 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그에따라 평화도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모든 은혜와 평강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음속에 늘 근심이 있거나 절망감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잘못된 신앙생활의 결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주님으로 부터 오는 평화를 소유하고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평강 뿐만이 아니라 은혜와 평강이라고 하였는데, 원래 “은혜”는 헬라식의 인사말이고 “평안”은 히브리식의 인사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이라고 한 것은 히브리인 뿐만이 아니라 헬라권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기도해 주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불평, 원망, 짜증, 비난, 정죄 등은 크리스천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축복으로 하루를 열고 축복으로 마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할 수 있는 자격은 형편이나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면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강과 은헤가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모든 믿는자들에게 늘 충만히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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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05 2010

에베소서 개요

Published by Jin Kim under 에베소서

서언

     에베소서는 구원문제와 또한 구원받은자들이 이룬 교회의 기초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바울 사도의 서신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하면서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습니다. 특히 복음이 유대문화권에서 타 문화권으로 넘어가면서 겪는 마찰과 충격은 교회의 존립 그 자체를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복음이 전파되면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충격을 가져왔고  그로 말미암아 사회적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 사도는 자신이 에베소에 있었을 때 겪었던 일들을 반추하면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의 편지인데, 이 편지와 또한 사도행전, 그리고 계시록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상황을 꽤 자세히 알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에베소 교회이 문제가 바로 오늘 우리 교회들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서를 통하여 에베소 교회를 연구하고 배우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 교회의 문제와 상황을 연구하고 해결하는데 귀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바쁘고 어려운 환경에 있으면서도 이 곳까지 찾아와 위로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2008년 10월,
북가주 금식 기도원에서
서언
        흔히 사도 바울은 모든 면에 성공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가 계획하고 추진한 일들은 잘 진행되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가 개척한 교회들은 모두 잘 성장하였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을 우상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바울 사도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비판하여 그분의 사역과 인품을 깎아 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한 인간 바울로서, 그분이 목회현장에서 갈등하고 마음 아파하며 겪었던 고난들을 생각하며, 오늘 나의 목회 현장에서 혹은 선교현장에서 그리고 믿는 자의 한사람으로서의 겪는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 받고자 함입니다.
        저는 바울 사도를 참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처럼 완벽하고 흠이 없으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저나 여러분들처럼 하나의 부족한 인간 이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는 전도하다가 조롱을 당하였고 붙잡혀 맞기도 했으며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심지어는 돌에 맞아 기절까지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개척한 교회가 분쟁이 났고, 자신도 그 분쟁에 휩쓸려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개척한 교회중의 하나인 에베소 교회도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유대교에서 온 기독교인들과 이방인들 중에 믿는 자들로 구성된 에베소 교회는 늘 이 두 그룹 간에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촉구합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라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또한 영적 전쟁이 그 어느곳보다 강하여 영적 전투에 승리하기를 당부하며 6장에서는 그 방법을 제시해 주십니다.

에베소의 지리적 배경
        에베소는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서 홍수에 의하여 도시가 자주 없어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뒤를이은 Lysimachus 는 3번째 세워진 에베소가 홍수로 인하여 침몰될 위험때문에 좀더 안전한 곳을 찾아 새로운 도시로 네번째 에베소를 세운 것입니다. 에베소는 배가 계속해서 드나들고 또한 도시가 매몰되지 않도록 도시 앞바다에 쌓이는 진흙을 계속해서 파내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도시가 발달하고 활기를 띠고있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합심하여 이 진흙을 파내고 도시를 잘 단장했습니다. 하지만 요한 계시록 2:4절 이하의 말씀대로 에베소 사람들은 처음 열정을 잃어갔고, 쌓여져가는 진흙으로 항구는 폐쇄되어갔고 이에 따라서 도시는 황폐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소아시아의 가장 큰 도시였던 에베소가 있었던 자리는 지금은 갈대가 무성한 진흙으로 덮혀 그 자취 마져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도 에베소인들이 항구에 쌓이는 진흙을 계속해서 파내야 했듯이 우리 마음속에 계속해서 쌓이고 또한 우리의 신앙을 덮으려고하는 옛 습성 특히 사탄의 세력을 자꾸만 파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진흙을 파내고 도시를 정비하여 소 아시아의 가장 크고 부자 도시로 그 위용을 떨쳤지만 식어버린 열정으로 결국은 쌓이는 진흙에 묻혀버린 에베소를 생각하면서 여러분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의 기쁨과 열정을 아직도 갖고있는가?
   .과연 나는 에베소 교인들이 갖고있었던 신앙을 지키기위한 수고와 인내와 열정      이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나는 모이기에 힘쓰는 자인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의 역사적, 정치적 및 종교적 배경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인구가 당시에 50만에 달하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기원전 1044에 아테네의 안드로 클루스가 원주민을 추방하고 최초로 도시를 세운 것이 에베소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54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정복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후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써 에베소는 다시 그리이스의 영토로 되었습니다. 그후 기원전 133년에 그리이스가 로마에 망하면서 에베소는 다시 로마의 통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시는 로마 정부에 특별히 충성봉사한 것이 인정되어 자치제도가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는 일이없이 로마의 장관이 관할지역을 순회하며 통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과는 달리 제한된 범위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중의 하나였으며 무역의 중심지요 또한 은행이 발달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에베소는 여러 종교들의 집산지와 같았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세계 7대 불가사 중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그 길이가 130 미터 넓이가 67미터, 그리고 120개의 둥근 기둥으로 세워졌는데 그 기둥들의 높이는 18미터나 됩니다. 그 신상은 수십개의 풍만한 유방을 갖은 여신으로서 그 당시의 음란한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설립
        에베소 교회는 사도행전 18:18절 이하에 있는바와같이 열성적인 신앙을갖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도움으로 이교도의 온상에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처음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강론하였습니다. 하지만 별 성과가 없자 유대인들과 결별하고 두란노 서원에서 예수의 복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강론하였습니다.(사도행전 19:8-10) 두란노 서원은 아마도 헬라어를 가르치던 학교로 믿어지고 있으며, 아마도 바울은 유대인상대의 사역을 떠나 헬라문화권에 있는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나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가 매우 심하였던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지기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방땅에 사는 유대인으로서 자기 민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면서도 그런곳에서 사역을 계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을 떠나지않고 하나님의 사역에 전심전력하여 바울을 도와 교회살림을 이끌어 나갔던 것입니다. 
       한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처해진 상황이나 환경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봉사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일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이런사람 들의 희생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요한 계시록 2:6절 이하에 보면, 열성적인 믿음으로 시작된 이 교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한 입술만이 아닌 실제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또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과 자칭사도라고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몰아냈던 즉 영적 분별력도 가졌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9:24절 이하에 보면 이 에베소 교회에 큰 시련이 닥칩니다. 그 당시 아데미 신전을 구경하고 또한 그곳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에베소로 왔으며, 이 외부인들이 뿌리는 돈이 에베소의 중요한 수입원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면서 사람들이 아데미 신전을 우상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데미 신전으로 인하여 성행하던 Business 가 급격히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데메트리오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바울이 에베소 도시를 망하게 한다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몰아내고자 합니다. 그는 은으로 아데미 신전모양등 각종의 기념품과 우상들을 만드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이 줄어들면서 자기의 상품이 팔리지않아 자신의 Business 에 큰 타격을 입게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메트리오는 종교적인 문제를 경제적인 문제로 몰고가서 더욱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전 에베소 시에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교회가 세워져서 성장하려면 사탄의 시험과 방해가 꼭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지금까지 겪어온 어려움도 많았지만 앞으로 더욱 성장하여 교회 건축을 하고 완전히 독립해 나가기까지 남은 시험과 사탄의 방해공작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험과 방해에 대비하여 지금부터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인들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참으로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했던 교회가 50여년이 지난 서기 93 년 경에는 첫 사랑을 잃어 교회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교회로 타락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처음 교회 개척당시의 사람들이 나이들어 죽어가자 교회의 신앙도 죽어가기 시작했고, 결국은 자녀들 때에와서는 교회로써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름뿐인 교회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첫 사랑을 잃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우리들의 자녀들의 신앙을 위하여 기도와 물질로써 후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죽기까지 변하지 않는 신앙을 갖고 있는가?
   .과연 나는 나의 자녀들의 신앙을 위하여 얼마만큼 기도하고 있는가?
   .과연 나는 나의 자녀들의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에베소서의 개요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로써 중심내용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라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먼 곳이나 구석에 쳐밖혀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옥중 서신으로서 에베소 교회뿐만이 아니라 에베소근처에 있던 교회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하여 읽는 자들에게 신앙생활을 더욱 신실하고 헌신적으로 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특별히 예배와 기도를 중요시 여겼으며 이 두 가지를 생활화하라는 권면의 서신입니다.  믿음이 약해져가고 교회의 예배가 자꾸만 세속화되어가고 또한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참으로 적합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수요일마다 에베소서를 가지고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 각 가정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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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27 2010

성경공부

Published by Jin Kim under 공지사항

8월 첫째주일(8월 1일) 부터 12:00 시부터 매주 1시간씩 제자훈련 성경공부가 시작됩니다. 기도로 준비하시고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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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21 2010

예수님의 리더십

Published by Jin Kim under 리더십 컬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Brother Kim! Good to see you again” 하시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James 목사님은 1961년부터 목회를 시작하셨으니 장장 50년째 사역을 해오시는 현역 목사님이시다. 10년 전에 이미 은퇴를 하셨지만, 곧바로 당신 연세만큼이나 오래된 교회를 맡아 사역하고 계신다. 낡은 포스터와 빛 바랜 흑백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만 보아도 이 사무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가구라고는 낡은 소파와 삐걱거리는 의자뿐이다. 처음에 장만할 때에는 모두 새것이었겠지만 그간 교회와 함께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주었기에 이제는 기력이 쇠미한 노인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소파에 앉으니 쿠숀이 워낙 낡았는지라 푹 들어가 내가 소파에 묻히는 듯 했다.

내가 James 목사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 분의 낙천성이다. 만날 때마다 항상 껄껄 너털웃음을 웃으신다. 그분이라고 무슨 사연이 없었겠는가? 슬픔이나 아픔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낡은 회전의자를 좌우로 돌리며 “Brother Kim! Do you know what?” 을 연발하시면서 흥겹게 말씀을 하신다. 그러다가도 사모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시기 때문에 점심때가 되면 만사 제쳐놓고 집에 가신다.

젊은 날 사역 현장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껄껄 웃으시면서 말씀하신다. “어느 교회에 부임했을 때의 일이었지. 교인수가 약 250명 정도는 되었었어. 그래서 교인들을 개인적으로 알고자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아마도 부임한지 한달쯤 되었을 거야. 집사 한사람이 내 사무실에 찾아와서 ‘교인들에게 보내시는 편지 제가 먼저 읽고 부치겠습니다’ 라고 하더군.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자기가 검열하겠다는 거야. 참 웃기는 사람도 다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 사람이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던 거야. 말하자면 그 사람 교회였던 셈이었지. 그래서 그 다음주로 사표를 내 버렸어.”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웃는 것은 항상 기뻐서 그런 것만은 아닐세. 언젠가부터 내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이렇게 웃는 법을 배운 거야” 라고 하시더니 시선의 초점을 창 너머 먼 곳에 맞추시는 듯 하신다. 그러더니 갑자기 조용해진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목사님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눈물 대신 완전히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었는데……그 날 그 말을 해 버렸어.” 그리고 또다시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나도 잠시 갚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다가, “저도 전임교회 문 앞에서 강제로 떠밀려 나올 때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었는데 ‘당신들이 지금은 힘으로 밀어 부치며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무슨 어려운 일이나 뜻밖의 불행이 닥칠 때마다 오늘 이 상황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해 버렸습니다. 그 때에는 너무 어이없고 억울하고 화가나서 한 말인데, 그들의 담임목사로서 그런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고 하였더니, 잠시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조용히 입을 여셨다:

그러니까 벌써 오래 된 일이지, 그 녀석이 그 당시 31살 때이니까. 그러고 보니 꼭 20년이 되었고만. 나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네. 참 착한 아이였지. 키도 나보다 훨씬 컷고 마음씨도 착하였었지. 참 좋은 아이였는데 의지가 좀 약했어.

그 녀석이 어릴 때부터 당뇨를 앓았지. 상당히 심각했어. 당뇨가 심해지니까 콩팥도 나빠지더라고. 그리고 음식을 절제하여야 하는데 녀석이 그러지 못했어. 나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했고, 나중에는 투석을 하다가 결국 내 콩팥을 하나 떼어 주었지. 내 아들을 살리겠다는데 그까짓 콩팥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녀석이 내 콩팥을 가지고 살면 이제 좀 절제해야지.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어.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이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시는 거야. 그래서 어느날은 내 콩팥에 무리를 주지 말라고 내 콩팥을 Abuse 하지 말라고 야단을 쳤지. 그런데 그것이 그만 그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야. 내가 왜 그런말을 했을까? 그 말만은 하지 말아야 했었는데, ‘네 몸 속에 있는 내 콩팥 잘 간수하라’ 고 해 버렸어.

갑자기 요한복음 21장의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생각났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 사랑 할수 있느냐? 아니요 주님, 난 우정의 사랑 밖에는 할수 없습니다.” 두 번째까지 똑 같은 질문이 오가더니 세 번째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우정의 사랑밖에는 할 수 없단 말이냐?” 라고 물으시자 이번에는 “세상 모든 것을 아시며 내 마음의 생각까지도 다 아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우정의 사랑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까지 포기하셨는데, 나는 과연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얼마나 양보하고 희생했는가?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누어 준 아들에게 콩팥하나 떼주고서도 ‘내 콩팥 잘 간수해’ 라며 아까워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주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내가 떼어준 내 몸의 일부가 Abuse 당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내 피붙이 아들일지라도 이렇게 섭섭하고 화가 나는데, 나와 피를 나누지 않은 이웃에게는 얼마나 더 섭섭하고 화가 날까?

 물론 수혜를 받은 사람도 항변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주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잊어야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랍니까? 매주마다 당신 장기를 내가 잘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서라도 올리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아깝습니까? 그렇게 후회스럽습니까? 자, 내 배를 째고 꺼내 가시오.

하지만 나에게 생명을 떼어주신 우리 주님, 우리가 그 분의 생명을 가지고 산다면 최소한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는 아닐까? 그렇다면 그 분의 심장을 달고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 김 진환 목사
www.riveroflifes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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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21 2010

예수님의 리더십

Published by Jin Kim under 리더십 컬럼

건축설계 업을 하는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6.25 한국 참전용사 기념관 앞에 있는 Tower 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공사까지 맡아서 완공한 다음에 시(市)에 기증하신 분이다. 이번에 큰 Project 를 땄노라고 골프장에서 만나자고 한다. 골프장 안에 이렇게 화려한 식당이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던 일이다. 그 부부는 자주 왔었는지 들어서자마자 척 알아보고 귀빈대우를 해준다. 우리 예수님 덕택에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니 황송하기도하고 감사하기도한 정말 묘한 기분이다. 내가 목사가 아니면 이 분들이 자기들의 좋은 일에 나를 부르겠는가? 더구나 이 비싼곳으로 불러 내겠는가?

사실 편한 복장에 찌게백반이 나에게는 더욱 어울리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는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하지만 한번쯤 귀빈 대우를 받는것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좋으니 음식도 까르끔하고 맛있다.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대한민국 시국에 대하여 그리고 결국은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으로 흘러갔다. 대충 요약해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나는 소통 대통령이 되겠다” 고 공약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였고, 그리하여 국민들은 “드디어 내 말을 들어 주는 대통령이 탄생하겠구나” 라며 많은 사람들은 기대하였다. 나라님께서 백성들의 이야기도 좀 들어 주시겠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소통이 리더십의 가장 핵심이라는 것을 그분은 잘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들의 가장 큰 문제점도 바로 소통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년 후 그 분의 모습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통행이다. 전직 대통령들보다 더욱 막무내기 라는 의견들이 많다. 사람이 변한 것일까? 본래 그런 사람이었는가? 누구나 그 자리에 올라가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물론 소통은 리더십의 가장 핵심이지만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것임을 또 한번 증명한 셈이 된 것입니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우리 목회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섬기시는 교회 목사님은 물론 아주 훌륭하신 인격자이시지만, 그래도 고집이 세시다는 것을 가끔씩 느끼지 못하십니까? 교인이 300명만 되어도 교회 안에 여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가려면 자연 고집스러워 집니다. 대통령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고집스러워져야 하고 목회자는 예수님과 교인들을 위하여 고집스러워져야 하는데 때로는 자신을 위하여 피우는 고집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실망하고 그러다 보면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자, 설계사도 설계도를 통하여 소통을 합니다. 그 설계도가 얼마나 잘 되었느냐는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잘 소통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한 Project 에 여러 사람들이 응모를 합니다. 그런데 그 경쟁에서 이기려면 소통이 잘되게 그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통을 잘하려면 설계 용어와 도면을 통하여 자기 의사를 정확히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대통령도 자기 속 에있는 것을 그대로 말씀해 주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며 따진다.

그렇습니다. 말 못하는 컴퓨터도 입력만 정확히 집어넣으면 아주 정확하게 계산해주고 정확히 그려냅니다. 컴퓨터는 스스로 생각하지도 만들어 내지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Manipulation 할 줄도 거짓말 할 줄도 모릅니다. 기계는 감정도 없이 들어오는 대로 반응하기 때문에 당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나아가면 당신 컴퓨터는 당신이 명령한 그대로 반응하게 됩니다. 당신이 아무리 화를 낼지라도 당신의 컴퓨터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도 당신의 컴퓨터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여전히 똑 같은 반응을 할 것입니다. 체면도 상황 파악하는 것도 없습니다. 환경에 상관없이 그저 액면 그대로 반응합니다. 또한 기계는 소위 말하는 Body Language 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Computer Language 는 우리의 언어에 비하여 아주 간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 방법이 단순하고 오해할 소지가 거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소통하기 훨씬 쉬운것 이닙니까?

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 듣게도 되고 (Selective Listening) 그로 인하여 오해도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고 감정이 실리고 심하면 손발짓이 뜨르게 되지않습니까? 때로는 아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거나, 듣기만 해 주거나, 그저 웃기만 하는 것도 소통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설계도 그리는 Program 이 복잡하고 다양하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언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단순한 Language 를 사용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라고 설명을 했는데, 아직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그런데 사실 대통령의 소통방법에 문제가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종시나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좀 기울여 주면 될 텐데, “이 사업은 바로 여러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라는 구호를 반복하며, “지금은 이렇게 반대하지만 해놓고 나면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라는 태도는 국민들의 반감만 더 사게 된다 는 사실을 정말 모르실까? 대통령께서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선포했다 할지라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통령만 옳고 나머지 백성들은 다 틀렸다는 의미로 들릴 텐데, 과연 납득이 잘 가는 표현일까?

중학교 다니는 아들에게, “학원에 등록해 놓았으니 빠지지 말고 꼭 다녀라, 다 너 잘되라고 없는 살림에 큰 돈 들여서 하는 것이다. 지금은 듣기 싫겠지만 이 다음에 좋은 대학에 가고 나면 나를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라고 하였더니 왜 자기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했느냐고 짜증을 부린다. 너를 위한 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라고 설득하였지만 아이는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다는 그 자체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주님은 소경거지 바디메오가 부르자 그의 말을 들어 주셨다. 어린아이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집에도 가셨고,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각계 각층의 온갖 사람들과 다 소통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항상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 만은 아니었다. 입술이 마를 정도로 Tension 이 있을 때도 있었고 호되게 책망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돌로 맞으실 뻔도 하였다. 중요한 것은 분위기나 나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와든지 소통은 잘 되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통을 이처럼 가능하게 하셨을까?

진실함이다. 주님은 진실 그 자체였다. 인기에 연연해 하시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진실을 말씀하셨고 진실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 진실을 위하여 사신다는 것을 삶을 통하여 보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멧세지는 실용이나 중용이나 보수나 진보등으로 포장된 무지개 색깔이 아니라 항상 간단하고 명료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잘 들어 주셨다. 직위나 노소에 상관없이 귀를 기울여 잘 들어 주셨다.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흑암에서 죄책감에 시달려 사는 한 여인을 위하여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수가성까지 그 먼 길을 찾아가셔서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들어 주셨다. 너희들도 이렇게 사역하라는 멧세지가 아닌가?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 김 진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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