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12 2010

예수님의 리더십

Published by Jin Kim under 리더십 컬럼

독자 여러분들은 언제 크게 웃어 보셨습니까? 언제가 마지막으로 기쁘고 즐거워서 가슴을 열어제치고 후련하게 웃어 보셨습니까? 금년 한해는 여러분들의 가정이나 섬기는 교회나 사역지에 기쁜일이 많아서 날마다 배꼽이 빠지도록 웃을수 있는 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어느 집에 종달새 한마리를 키웠습니다. 날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이 종달새는 조그마한 새장을 이리 날고 저리 날며 시끄럽게 떠듭니다. 누구든 새장 옆에만 가도 마냥 지절거리고, 그렇게 해서 온 식구들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보니 새장이 너무 더럽고 지저분하여 냄새도 나고 나를때마다 먼지가 납니다. 그래서 진공청소기로 새장 안의 더러운 오물들을 빨아드리면서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따르릉 전화벨이 울립니다.
그래서 잠깐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이 작은 종달새는 후르륵 새장안의 쓰레기들과 함께 진공 청소기에 쏙 빨려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와보니, 잠깐이었는데 그 사이 새가 없어졌습니다. 아차 싶어서 얼른 청소기 뚜껑을 열고 Vaccum 종이 백을 찢어냈더니, 아 글쎄 이 불쌍한 종달새가 그 속에 더러운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 덜덜 떨고 있습니다. 얼른 꺼내어 솔로 떨어주고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헤어드라이로 잘 말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 종달새의 울음소리는 그쳤습니다. 밥도 제대로 먹지않고 그저 새장에 우울하게 앉아서 꾸벅 꾸벅 졸고만 있습니다. 예전처럼 지저귀라고 재잘재잘 삐약삐약 소리를 내보고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보아도 귀찮은듯 한두발짝 뒤로 물러설뿐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환난을 겪다보면 삶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웃고 싶어도 아픈 상처와 괴로움 때문에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더이상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체념속에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녀는 가나안으로 이민온 초기에는 가난에 시달리다가 애굽왕의 수청을 들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자기를 지켜주어야 할 남편이 자기만 살겠다고, “이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라 내 여동생입니다” 할때 얼마나 기가막혔겠습니까? 아마 이때부터 사라의 삶에서 웃음이 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아이를 낳지못하여 궁여지책으로 자기 몸종 하갈을 남편에게 드려보내고 눈물로 밤을 지새었지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멸시와 천대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기는 커녕 남편은 “당신 종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라” 고 딱 중립을 지킵니다. 정말 사라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나날이 슬픔으로 얼룩진 그녀의 삶에 어느날 찾아오신 하나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을 엿듣게 됩니다. “우리 남편의 나이가 지금 몇인데 그리고 내 나이는 몇이고, 하나님은 농담도 잘하시네” 하면서 사라는 쓴 웃음을 짓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대로 사라는 아들을 낳게됩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자기의 삶에는 더이상 웃음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도 바라고 그렇게도 원했던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니 얼마나 감격하고 기뻤겠습니까? 이 얼마만의 웃음입니까? 너무도 기쁘고 즐겁고 우스워서 아들 이름을 “웃음” 이라는 뜻으로 “이삭” 이라고 짓게 됩니다.

노년에 첫아기를 낳으니 그 산고는 말할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을 낳는 그 기쁨에 너무 좋아서 애를 낳다가도 배꼽을 잡고 웃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통쾌합니까? 얼마나 후련합니까? 사라는 그 아들을 꼭 안고 너무도 감사하고 감격하여 오래토록 흐느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고맙고도 웃기시는 분, 생각만 하여도 너무 감사하여 눈물이 납니다. 특히 고난중에 찾아오셔서 웃기시는 하나님, 여러분의 삶에도 웃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웃음이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년간 아니 십여년간 열심히 기경하고 씨를 뿌려왔지만 사라의 닫힌 태처럼 아직도 만족할 만한 결실을 보지 못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실망과 좌절 그리고 아픔으로 주저앉고 싶으신 분들도 계실수 있습니다. 고난의 떡과 수고의 땀이 수치와 원망으로 돌아올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럴때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어제는 어른들 5000명을 비롯하여 만여명의 성도가 하룻밤 사이에 다 떠나고 겨우 열두명이 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놀라지 않으시고 “너희도 가려느냐?” 고 물으십니다. “주께 영생의 말씀이 계시온데 우리가 누구를 따라 가겠사옵나이까?” 는 베드로의 고백이 침묵을 깨고 무겁게 들려왔지만 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너무도 가슴아프게 들려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지만 주님께서 승리하셨기에 우리도 승리합니다. 주님의 승리를 굳게 믿을수만 있다면 어떠한 고난에서도 우리는 반듯이 승리합니다. 그리고 이삭을 안고 웃는 사라처럼 우리는 웃게될 것입니다. 아니 너무도 감사하고 너무도 고마워 흐느끼게 될 것입니다. 금년 내내 아니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웃게 하시는 우리 주님 때문에 배꼽잡고 웃다가 너무 감사하여 흐느끼는 사역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강 교회 김 진환 목사  Agape2000@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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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7 2010

광야로 내몰린 예수님

Published by Jin Kim under 마가복음, 주일 설교

마가복음 1:9-13절

여러분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 광경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침례 요한은 수염은 앞가슴까지 모두 가리고, 그의 긴 머리는 어께를 넘어서 허리까지 내려오고, 여기에 나귀 가죽을 두른채 메마른 사막의 한 바위에 서 있습니다.
얼굴은 온통 수염으로 둘러쌓여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두 눈은 광채가 납니다.
그 밑에는 예루살렘등 유다 각 사방에서 몰려온 수 많은 사람들이 갈급한 심정으로 두 손을 들고 “오, 하나님 도와 주옵소서, 우리를 로마의 학정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며 외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향하여 요한은 불같은 눈을 번득이며, “회개하라” 고 외칩니다.
그러자 회중들은 “아멘, 아멘” 합니다.

그러한 회중들을 요단강으로 인도하여 한사람씩 한사람씩 침례를 줍니다.

침례를 주다보니 그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있습니다.
그러자 침례요한은 눈을 부릅뜨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고 호통을 칩니다.
그들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조아리고 침례를 받습니다.

이처럼 요한이 한참 침례를 주고있을 때,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를 떠나 요단 강으로 나아오십니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아버지가 하던 목수일을 그만두고 괴나리 봇짐을 싸서 동으로 동으로 요단강 쪽 광야를 향하여 오십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결혼하여 자녀를 여럿 두었을 나이인데, 주님은 결혼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오신 것입니다.

얼마를 걸리셨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하루 이상은 걸려서 요단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침례받는 사람들의 행렬에 서서 침례 요한으로 부터 침례를 받게 됩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요한의 회개의 침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첫눈에 이분이 보통 사람은 아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침례 요한도 Anointing,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자마자 자신보다 훨씬 깊고 강한 기름부음이 있으신 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앞에서 겸손하게,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라고 여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3:15절에,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침례 요한의 원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그 당시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알려진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주었다면 상황은 여러면에서 암청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겸손하게 침례 요한으로 부터 침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이룬다는 의미이며,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거치는 단계이며, 또한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계시를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10-11절에, “곧 물에서 올라 오실 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물에 침례를 받으시려고 물속에 잠기셨다가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막혀있던 것이 이제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막혔던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고있었던 장벽이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이제껏 막혔던 담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물어짐으로써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많은  우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부터 신령한 축복들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예수님에게  내려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성령님이 예수님께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는 이제 예수님이 그 성령으로 충만하시며, 성령에 사로잡히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성령의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역을 하실 것이며,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음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과 권한을 다 받으셨음을 예수님도 알고 옆에 있던 침례 요한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백전 백승할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세를 주셨고,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늘 함께 하실 것임을 확증하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하며 기쁨이 넘치는 일입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바로 후에,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 내신 지라 광야에서 40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처하셔서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방금 비둘기처럼 예수님의 어께에 내려앉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강제로 광야로 몰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시험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성령이 당신 위에 임하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고 확증하여 주셨는데,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권세가 임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예루살렘이나 헤브론 등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많은 이적이 나타나고,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데, 왜 광야로 내 몰림을 당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게 되십니까?
성령님이 임하셨으면 엄청나게 좋은 일이 생겨야 하는데, 낮에는 뜨거운 태양과 밤에는 취위에 시달리며 먹을것은 커녕 마실 물도 없는 왜 그 고난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까?

논리적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큰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큰 사역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실수 있도록 마음속의 모든 불순물이 빠져나가도록 광야로 내 보내는 것입니다.
광야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대 일로 다시 만나게 되고, 그 분의 사랑에 다시 압도되어 마침내는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잘못, 비판등도 포용할수 있게되는 큰 그릇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식민지 생활에서 나오자 뒤에서 이집트 병사들이 추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에는 홍해바다였습니다.
이제 이집트 병사들은 곧 들이닥쳐 칼날을 휘두를텐데, 그렇다고 바다에 뛰어 들수도 없고, 정말 어떻게 할수가 없자 그들은 모세를 이렇게 원망하녔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애굽기 14:13-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찌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고 하십니다.
모세가 그대로 하자 너른 홍해바다가 싹 갈라지고 바다가운데 길이 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무사히 건너갔지만, 뒤따르던 이집트 병사들은 바닷물속에 다 빠져 죽었습니다.
이제는 안전하게 홍해 바다를 건넜고 또한 자기들을 추격하여 오던 원수들이 다 빠져 죽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들은 거기가, 즉 홍해바다만 건너면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광야로 들어가는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춤을 추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젖과 꿀은 고사하고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할수 없는 끝없는 광야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지금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훈련 한번 받아보지 못했고 전쟁한번 치르지 않았으며 그저 남녀노소 함께 뒤범벅이 된 오합지졸들입니다.
이런 오합지졸들이 그냥 그 상태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가나안의 훈련된 병사들에게 다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광야생활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며 사는 법을 배우게 하셨고, 또한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전쟁에 나갈만한 병사들을 선별하였고, 나팔 소리로 모이고 흩어지고 또한 돌격하는 등의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 40년 동안의 철저한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다져졌고, 또한 군사훈련을 받은 까닭에 가나안의 병사들을 파죽지세로 섬멸하였던 것을 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보면 훈련을 더 받으라고, 더 큰 그릇이 되라고, 더 중대한 사역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광야로 내 모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미 모두 준비된 그릇이셨지만 이렇게 하신 것은, 누구든지 우리의 모든 면에 모본이 되신 예수님처럼 사역하려면 예수님의 Foot Step 을, 심지어는 십자가의 고난까지도 따르게 될 것이라는 예증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보거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 주님의 소중한 사역을 감당하는 분 치고 광야생활을 하지 않으신 분이 없습니다.

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William Carry 는 인도로 선교를 갔는데, 1년 내내 한명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큰 아들이 죽자 자기 아내는 미쳐버립니다.
이것이 이분에게는 광야의 고초였습니다.
하지만 그 고초가 지나자 전도길이 활짝 열리고, 인도내의 26개 이상의 부족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폐병으로 죽음을 드나들다가 예수를 믿고 새생명을 얻어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폐병이 광야의 고초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 교회 건물을 짓다가 부도가 나자 성도들은 다 떠나 버렸고, 짓다만 건물의 철골은 빨갛게 녹이슬어 콘크리트를 깨고 그 녹슨 철골을 다시 뽑아내는 공사를 해야하고, 은행에서 대출은 안해주고……
마침내는 자살까지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짜피 죽는것 기도하고 죽겠다고, 그 문제를 놓고 밤낮으로 기도하였는데 , 그 얼마후 한 조그만 은행에서 대출을 해 주더랍니다.
비록 큰 돈은 아니었지만, 그 돈으로 공사를 다시 시작하며 힘을 얻어 오늘날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건축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종요기 목사님이 거쳐간 광야의 고초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광야의 고초를 통하여 그분의 영성이 깊고 커졌으며, 더욱 큰 그릇으로 만들어져 그 큰 교회를 이끌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일본에 휴대전화 케이스를 납품하는 한 중소기업 사장이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더군요.
처음 시적할때부터 무척 힘들었는데, 엄격한 품질관리로 조금씩 그 기술을 인정받아 국내 회사들에게 납품할 길이 열리더랍니다.
그리고는 마침내는 일본에 납품할 길까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에 납품하는 것은 품질관리를 특별히 더 엄격하게 하여 납품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75%가 퇴짜를 받았답니다.
그래서 항의를 하러 그 물건을 가지고 당장 일본으로 날아갔답니다.
그런데 색깔이 육안으로는 정확히 맞는것 같아 자신있게 찾아갔는데, 일본 사람들은 현미경을 놓고 보여주며 무엇이 어떻게 틀린가를 기계가 데이타로 보여주더랍니다.
이 일로 인하여 회사는 거의 파산지경에 빠졌는데, 이 기회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정밀한 품질의 휴대전화 케이스 납품회사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 Scotts Valley 에 있는 기도원 원장님도 엄청난 광야의 고초를 겪으신 분이십니다.
돈많은 집으로 시집을 갔고, 일찍 San Fransico 로 이민와서 여유있는 생활을 하였답니다.
교회는 일년에 서너번씩 큰 행사가 있을때에 출석하는 것이 고작이었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편이 돌아가시고 가산이 기울자 어떻게 할수가 없더랍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걸을 힘도 없는데, 하루는 San Fransisco Downtown 근처를 걷는데, 가다보니 공사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공사를 하는가 가까이 가서 보니 지하 깊이 파 내려가더래요.
그것을 보면서, 아하 더 깊게 내려갈수록 건물을 더욱 더 높게 세울수 있겠구나 라는 깨우침이 오면서 마음에 위로가 오더랍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하나님이 김목사님을 광야로 내 모신 거에요. 이제 앞으로 큰 사역을 하시게 될 거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물을 덮어 놓은 것처럼 그대로 견디라고 하신 거에요. 그러니 굳건하게 잘 견디세요. 때가 되면 이제 그 그물을 걷어 주실 것이고, 그러면 아주 큰 사역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이 광야생활을 꾹 참고 하나님의 Season 을 기더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도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지금 제가 아직 준비가 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보내 주셔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아직 안 보내주시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 생명의 강 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 질수 밖에 없고, 자존심을 완전히 버릴수 밖에 없고, 바울 사도처럼 학벌이나 목회경력도 배설물처럼 버릴수 밖에 없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 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길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광야 생활을 통하여 제 마음가운데 있는 세속적인 불순물이 빠져나가는 연단과정을 거쳐 그 분앞에 정금처럼 나아갈때, 제 마음이 좀더 큰 그릇으로 다듬어 질때 하나님께서는 많은 성도들을 보내 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기도원에서 주신 비전과 확신을 가지고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를 시작하였던 것 만큼,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Bay Area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증거되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광야 생활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오직 하나님께서 더욱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특권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척 발버둥치며 괴로워하고 억울해하기도 참 많이 하였지만, 시편 136:16절,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는 말씀처럼 지금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광야 생활을 통하여 저희 부부의 신앙의 깊이가 한단계 더 깊고 높은 단계로 성숙하게 된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에는 물질의 광야도 있고, 사랑의 광야도 있고, 건강의 광야도 있고, 명예에 대한 광야등 수많은 광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 비추어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여러 부분의 광야중에서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의 광야로 내 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그 부분이 나의 신앙생활에 가장 고쳐져야 할 부분이고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기에,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면 내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내 방법대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부분의 광야로 인도하셔서, 나를 부수고 빻아서 다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 안에서 당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지금 광야 생활을 시작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혹은 광야의 한 복판에서 힘들어 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광야 생활을 거의 마치고 지금 모압 평지 쯤에 다달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마시고, 옛날 길로 돌아가지 마시고 이 광야를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 광야 길을 차분하게 통과하십시다.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를 떠나 애굽으로 돌아가다가 광야에서 길잃고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같이 이 놈의 만나만 먹으니 영양실조 걸리겠고, 삶에 낙이없다고 불평하며 애굽으로 되돌아 가다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맛없는 만나를 먹으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끝까지 광야 생활을 이겨낸 사람들 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갈수 있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본문 13절에,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매정하게 광야로 내 쫓았지만, 행여 고통중에 쓰러져 영영히 못 일어날까 우리를 도우라고 천사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때에따라 돕는 은혜로 말미암아 숨도 못쉴만큼 극심한 환난중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웃을수 있는 여유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처한 이 광야 생활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이 광야를 인내하며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맛이없고 매마른 만나만 먹다보니 신앙의 영양실조도 걸리겠고, 너무 힘이 없이 매말라 간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이 만나를 먹은 자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고 급할지라도 불기둥과 구름기등이 움직일때 움직이고 멈출때 멈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다같이 눈을 감고 같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광야를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누릴 가나안의 축복의 정도도 결정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광야 어느 부근에 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선명하게 바라볼수 있는 믿음을 달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광야의 갈증과 질픙에 쓰러지지 않도록, 오아시스와 쉴만한 그늘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우리들을 수종들라 보내주신 천사의 도움으로 이 광야 길을 잘 통과할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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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6 2010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라

Published by Jin Kim under 마가복음, 주일 설교

마가복음01:07-08

February 28, 2010

지난주에는 마가가 로마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이것이 유왕겔리온, 복음 즉 좋은 소식이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원래 유왕겔리온이란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단어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황제의 전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왕자가 결혼을 한다든지 혹은 황태자가 태어나는 등 황실에 경사가 났을 때의 소식을 “유왕겔리온” 이라 하였습니다.
이때 황제는 헤럴드, 즉 전령들을 풀어서 유왕겔리온 을 선포하고, 전 국민에게 세금을 감면해주든지 죄수를 풀어주든지 옷감이나 곡물등 선물을 하사하였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황제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최근에 북한 김정일이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전 국민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을 유왕겔리온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유왕겔리온 하면 온 백성들은 황실의 경사의 소식과 함께 황제의 하사품을 기대하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그것이 유왕겔리온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 되신다, 이것이 바로 유왕겔리온, 가장 기쁜 소식이다” 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황제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정말 목숨을 건 획기적인 선포입니다.

하지만 로마가 결국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독교국가가 되면서, 유왕겔리온은 마가가 선포한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전도라는 영어의 단어 Evangelism 이 파생된 것입니다.

극심한 박해 속에서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의 구세주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를 이 환난 속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실까 라는 회의에 빠졌던 로마의 성도들에게, 마가는 이렇게 유왕겔리온, 기쁜 소식을 명쾌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침례요한이 요단강 북쪽, 지금 시리아 바로 아래쪽 아마도 골란 고원근방으로 여겨지는데, 그 쪽에 있던 광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은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며 거기에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백성들을 착취하는 세리들에 너무도 힘들고 지쳐 쓰러지고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이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들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메시아가 오신다는데 그 분께서 언제나 오실까? 속히 오셔서 이 로마 군들을 물리치고 평화의 왕국을 세워주셨으면 좋겠다 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침례 요한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에게 소망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있다” 라는 소문이 들리게 됩니다.
그러자 심령이 너무도 메마르고 갈급했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을 버리고 이 멀고 험한 광야에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멀리서 온갖 고생을 하며 자신을 찾아온 이 사람들을 위로하기는커녕, “회개하라” 고 경고하면서 회개의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7-8절은 요한이 광야에서 향하여 설교한 메시지 내용입니다.
그는 우선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다고 선포합니다.
자신은 오실 그 분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자신보다 능력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두나미스” 라 하여 땅이 갈라지고 지진이 일어나게 하거나, 병든자를 고치는 등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능력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산들을 보십시오.
몇 년 전에는 인디안 선교를 위하여 Grand Canyon West 에 갔었는데,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저 높은 절벽 위에서 빨간 흙탕물이 급하게 흘러내리는 강을 내려다 보는데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창조과학자들은 이것이 최초 지구 모습이라고, 하나님의 창조가 아직도 계속되는 증거라고 하는데, 이것이 최초 지구모습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해이티 지진 사태를 보십시오.
아무리 현대 과학이 발달하였다고 하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 앞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아직도 계속 팽창하는 우주, 그 끝없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누가 감히 도전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또 하나의 능력은 “Authority, 권세” 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임재하심과 말씀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80세된 아버님이 30살된 아들에게 이리오라 하면, “예” 하고 갑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어떻게 감히 거역할 수 있습니까?
이 아들이 아버지보다 힘이 없어서 복종합니까?
80먹은 노인의 힘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권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8: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거라사 지방에 가시니까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라고 합니다.
귀신들은 인간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의 권세에 벌벌 떨며 이렇게 부르짖은 것입니다.

이처럼 침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의 힘과 그 권세에 비할 때에 자신은 그 분의 종처럼 그 분 앞에 엎드려 그분의 신의 끈을 풀고 매어드리기에도 부족한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침례 요한은 지금 인기 절정에 있는 상태입니다.
원근 각지에서 그를 보려고 그 험한 곳에까지 목숨을 걸고 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날마다 엄청나게 늘어만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하게,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다.
그 분은 어찌나 고귀하시고 능력이 많으신지,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묶고 푸는 일 감당하기도 부족한 존재라면서, 자신과 그분과의 관계를 확실히 합니다.

누구나 겸손의 자리에 있는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조금 되는 것 같으면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우리 본능입니다.
더구나, 본인은 잠잠하고 싶은데 주변 사람들이 아첨하며 부추겨 세웁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져있다가, 조금 잘못되면 아첨꾼들도 떠나고 걱정 근심만 남게 되어 혼자 우울해집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이며 주변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런 우리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며 살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소유물도 모두 하나님 것이요, 나의 가정도 자녀들도 그리고 나의 생명도 하나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날마다 있어야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교만이 기를 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침례 요한은 바로 그 자리, 자기의 자리, 자기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았습니다.
침례요한처럼 항상 겸손한 자리에서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침례요한의 그 다음 멧세지는, 나는 너희에게 회개의 물침례를 주었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침례라 불침례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성경에 성령침례다 불침례다 라는 말은 없습니다.
Baptized by Holy Spirit, Baptized by Holy Spirit and Fire,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 라는 표현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Baptized by Holy Spirit,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이 문제를 너무 신비하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 특권층 만의 것인양 너무 신비주의로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언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가 의 시기 문제와, 또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의 행위나 현상에 대하여 논란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침례요한이 베푼 물로 침례를 받는 것과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 혹은 성령의 불로 침례를 받는다 라는 이렇게 두가지 종류가 소개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28.18-20절에서 명령하신,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가서 내 제자를 삼아 침례를 주고 내가 네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고 하셨고, 또한 마가복음 16.15-6절에,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 이라고 한
것은 회개와 새 생명을 얻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거나 불로 침례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고만 하셨을 뿐 실제로 행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5절에, 승천직전에 성령강림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시면서,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말씀하여 성령강림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 결국 동시에 일어나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였듯이 성령을 받는다는 것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 것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드리면, 그리하여 구원의 확신이 일어난다면 그때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요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혹은 기도하다가, 혹은 찬송을 부르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오고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것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으면, 그 사람은 이미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안에 성령님이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Pentecostal Church, 특히 “Assembly of God(하나님의 성회)” 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 다음 단계로 성령의 침례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것의 표적으로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방언을 권장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과 방언을 받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의 성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이 목사님의 가르침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이 목사님이 미국으로 선교사로 오셔서 선교를 하시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당장 교회 직분 자로 임명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압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은 자에 한하여 어느 정도 Probation 기간을 주었다가 직분을 맡겼습니다.

그 오랜 후에 미국땅에 감리교와 침례교가 크게 성장하는데, George Whitfield 라는 그 당시 획기적인 부흥강사 이후, 신학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부흥강사들이 여기저기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납니다.
그러자 영국의 감리교는 이러한 식 부흥집회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억제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부흥운동에 가담했던 감리교단 목회자들과 침례교단 목회자들이 1905년 Springfield, Il 에 모여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는데 그것이 바로 Assembly of God, 하나님의 성회 입니다.
그리하여 이 교단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이의 그 두단계를 발전시켜, 두 단계의 축복(The First Blessing and Second Blessing)이라 해서, 첫번째 축복은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두번째 축복은 성령을 받아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며, 그 증거로 방언을 말하게 된다는 교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사도행전에서 찾습니다:

1.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에 갔을 때 – 베드로를 초청하여 기도를 받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2. 베드로가 고넬리우스 집에 갔을 때 – 베드로가 기도하자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였다.
3.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 너희가 성령에 대하여 아느냐 하니 요한의 침례밖에는 알지 못한다고한다. 그래서 바울이 기도하니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더라.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서의 말씀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하여, “누가는 외부적으로 일어난 현상을 기록한 것이지 실제 내부에서 역사하시던 성령님에 대한 것은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과 동시에 성령도 받는 것이다.” 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Neo-Pentecostals” 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과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면 성령 충만함을 입기 때문에 결국 같은 현상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보십시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됩니다.
고린도 전서 12:13절에,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하였듯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하시는 근본 목적은 온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침례를 받았으면,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차별을 두려고 하지 않고, 한 형제요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방언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 수 낮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또 따따 하는 방언을 애기방언이라고 하면서, 말로 하는 방언이 더 우월한 것처럼 차이를 두려고 합니다.
이것은 방금 고린도 전서 12:13절, “한 성령으로 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라고 하신 말씀처럼, 진실로 성령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하는 행위가 아니요, 그렇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둘째,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나가서 전도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 성도들, 로마인들에게 붙잡혀 죽을까 두려워 다락방에 올라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10일 후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고, 각기 다른 방언, 여기서는 Speaking in Tung 이 아니라, 각기 다른 나라말로 이야기를 해도 한 성령 안에 있었기 때문에 다 알아듣게 됩니다.
즉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즉시 밖으로 나가서 전도하게 됩니다.
체포되어 죽지는 않을까 라는 두려움에서, 이제는 목숨을 걸고 전도를 하는 전도자들로 변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할 마음이 없으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 영혼에 대한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내 안에 성령님이 게시는 가, 과연 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더 기도하고 싶고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되면, 그 전보다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늘 기도하고 싶고 틈나는 대로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고 싶어집니다.
한 때 대중가요나 기타 다른 음악에 빠졌다가도 이제는 찬양이 더욱 재미있고, 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가슴이 뭉클해 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성령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도덕적인 문제 윤리적인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그만 거짓말에도 양심이 찔립니다.
물질적인 면에서도 하나님 것과 내 것에 대하여 정직해집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속마음과 생각까지도 다 아시며 감찰하시는 것을 알고, 이제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게 됩니다.
 
다섯째,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자들에게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자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이재하심, Anointing 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됩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아픈 상처가 치유되며 절망가운데 있던 자들이 소망을 갖게 되는 눈에 띄는 이적들이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의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 필요했을 까요?
엄청난 박해 속에서 그들이 믿음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요?
성령으로 침례를 받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그 분의 이재하심을 항상 체험하며 살지 않으면 어떻게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의 성도들은 성령의 침례를 받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일 듯 일어섰던 그 성도들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순교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처형 순간에도 기쁨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같이 죽어가는 동료들과 “저 천국에서 만나자” 며 기쁨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침례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믿음의 행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까?
방언을 말하고, 울고 불고 하는 것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증거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셨다고 한다면, 다음의 현상이 나의 삶 가운데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1.항상 주님 안에서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삽니다.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심 그 한가지로도 만족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닥치는 환난이나 고난에도 두려워 하지않고 담대해집니다.

2.내 뜻과 내 주장으로 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십니까?

3.그리스도 안에서 물질관이 바로 서게 되며, 말과 행실이 투명해집니다.

4.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전도와 선교등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삽니다.

5.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봉사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주님 앞에 나의 마음과 생각을 다 내 보이시며, 과연 나에게는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중에 몇 가지나 있는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격증을 따듯 어느 한 순간의 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체험, 즉 성령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성전 되시는 언제 고갈될지 모르며, 언제 사단의 유혹이나 시험 그리고 공격에 넘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는 여러분, 항상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참 증인의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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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3 2010

광야에서 일어난 부흥회

Published by Jin Kim under 마가복음, 주일 설교

마가복음 01:02-06절

February 20/2010
지난 주에 보신 바와 같이 로마에 있던 크리스천들은 극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깊은 실의에 빠집니다.
그간 베드로로 부터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소경의 눈을 뜨게하신 기적,  문둥병자를 고치신 기적,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에 대하여 설교를 생생하게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할수있는 이적,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베드로를 통하여 확인받은 것입니다.

바울사도로 부터는 다메섹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 만삭되지 못한 칠삭동이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 루스드라에서 앉증뱅이가 일어난 이적, 돌에맞아 죽었다가 살아난 이적, 삼층천 하늘에 갔었던 체험, 로마로 압송되어 올 때 유라굴라 라는 폭풍을 만나 배가 파선할때 일어난 이적등에 대한 설교를 들어왔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십자가에서 순교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셔 살아계신다는 증거요 주님의 특별하신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이처럼 로마의 성도들은 베드로로부터는 주님과 함께 살면서 체험한 현실적인 신앙, 바울사도로 부터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역한 부활신앙을 본받아 확신위에 섰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네로황제가 서기 64년 경에 들어서면서 발작적으로 크리스천들을 박해합니다.
그러한 무렵에 베드로 사도가 체포되어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체포되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구원해 주실 줄 알았는데, 끝내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어갑니다.
그 얼마후 바울사도의 재판이 있었는데, 박해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변론해줄 사람들이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사도 역시도 무참하게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극심한 공포와 불안과 혼란에 빠진 로마의 성도들,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 분이 과연 우리의 구세주냐” 라는 회의에 빠져 가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로마에 있던 유대교인들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기독교의 불완전성을 비판하며 그 당시 박해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유대교로 전향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로마인들에게 고소하겠노라고 협박과 설득을 합니다.
그리하여 불안과 공포에 질려 유대교로 전향하는 성도들과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그때 평생 베드로 사도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어왔던 마가가 나서서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은 과연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 되심,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기쁜소식, 복음입니다” 라고 간증을 시작하였습니다.
마가의 이 간증이 바로 마가복음이라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시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라고 전한 마가는 바로 이어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라며 듣는 자들을 광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침례요한을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시는 분으로 소개하면서, 침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하여 듣는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금 광야에서 침례요한의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있는 것처럼 상상하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광야는 어떤 곳이며, 왜 로마의 성도들을 광야로 초대하고 있을 까요?
광야는 완전한 사막은 아니지만,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땅이 건조하고 마실 물조차 구하기 힘들만큼 살기 힘든 곳입니다.
비가 오는 우기에는 초목들이 잠깐 자라다가 건기가 되면 일순간에 다 말라버리고 사막처럼 되어 버리는 곳이 광야입니다.

또한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공기가 무척 건조합니다.
그래서 한 낮에는 태양볕이 그대로 내려쬐게 되기 때문에 뜨겁지만 해가지면 춥고 드센 바람이 불어 굴속이나 움막에 들어가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는 농사를 지을수도 없고, 가축을 기르기에도 적합하지 않고, 오직 하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먹여주시고 인도하시는대로만 살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집을 짓고 정착해서 사는 곳이 아니라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위하여, 더 좋은 삶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정확하게는 약 38년 6개월 동안 광야생활을 하였는데, 그들이 이 길고 긴 광야생활에서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것.
그간은 땅을 바라보며 땅에서 나는 것을 바라보고 땅에서 나는 것을 거두워 먹고 살았는데, 광야에서는 돌멩이와 모래뿐 땅에서는 아무것도 나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받아먹고 살게 된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하늘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이 한가지, 정말 간단한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것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이 한가지를 터득하고 이러한 삶을 살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무려 40년동안이나 끌고 다니신 것입니다.

한편, 굶주리고 헐벗으며 로마의 병정들에 붙잡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주님의 보호와 도움이 아니면 한시도 마음놓고 살수 없는 상황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그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광야” 라는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그들은 “광야” 를 상상하며 자신들의 삶이 바로 광야생활과 같음을, 오직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바 없는 자신들의 현실을 바라보며, 광야에 놓여있는 것과 같은 자신들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에 침례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고 설교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광야, 즉 거친 들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침례요한, 좋은 옷이 없었기 때문에 온 몸에 낙타가죽을 두르고 얼굴은 온통 털로 뒤덮혀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두 눈은 샛별처럼 빛났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메뚜기를 잡아먹고 석청, 즉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살던 땅벌들의 꿀을 따서먹고 살았던 그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설교를 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침례요한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예루살렘이 아닌, 사람들이 살수없는 광야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곳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머물던 광야가 아니라, 요단강 북쪽 시리아 쪽의 광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려면 거리상으로나 교통편을 보면 보통 결단 가지고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멀고 힘든 곳입니다.
여리고를 통하여 요단강변도로를 타고 북쪽 시리아 쪽으로 죽 올라 왔을 텐데, 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왔을 텐데 아마도 최소한 이틀씩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면서 중간 어디 노중에서 야영을 해야했을 것이며, 또한 마실 물과 먹을 것도 충분히 준비해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침례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가려면 경비도 경비지만 건강한 사람들도 보통 각오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모험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 요한은 왜 이 광야에서 사역을 하였을까요?

광야는 인생의 훈련의 장이요, 신비의 장소입니다.
세상문명과 차단된 광야는 인간적인 욕망과 세속적인 향락이 정지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 자연이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나 있는 신성과 거룩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또한 순하고 약한 짐승은 살수없고 오직 거칠고 사나운 짐승이 험하고 메마른 바위틈과 굴속에서 사는 곳이요, 그러기에 두렵고, 외로운 곳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고난과 두려움과 신비가 얽혀있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광야로 나아가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서 입니다.

모세는 시내산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민족 구원을 위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유다남부 광야에서 고난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면서 거친 광야에서 너무도 괴롭고 무섭고 고통스러워 하늘을 향하여 “주여 어느때 까지니이까? 주여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돌리지 마옵소서” 외마디처럼 외치면서, 정금같이 연단되어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성군으로 다듬어져 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라는 야심찬 청년도, 밝은 대낮에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을 듣고 눈이 안보여 두려움과 고통속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당장에 전도하러 나갔다가, 전도는 커녕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하자 아라비아 광야로 도망쳐 거기서 3년을 헤메였습니다.
그리고는 야심찬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바울사도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고 자기 백성을 환난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형제들로부터 팔리움을 당하고 보디발의 노예생활과 이집트의 감옥이라는 끔찍한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감당시키기 전에 우리를 광야로 내몹니다.
그리고 거기서 세상의 모든 직위나 재물이나 명예를 다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세에서 주님을 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광야에 내 몰린 우리들, 아무도 아무곳도 의지하고 불평하고 호소할곳 없어서, 하는수 없이 하늘을 향하여 고통을 호소하고 하늘을 향하여 아픔과 억울함을 호소하고,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처럼 상처받고 쓰러져 신음할 때 주님은 손수 포도주와 기름을 가지고 오셔서 상처를 씻어 주시고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에 내몰려 지치고 쓰러져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주님께 내 맡길때, 주님은 오셔서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변에서 보면 광야에서의 고난과 고통이 크고 깊으면 깊을수록 그 사람의 기름부음(Anointing) 의 정도도 더욱 크고 강한 것을 봅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욥기에 기름부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욥이 받은 고난이 가장 극심했다는 의미요, 고난중에 기름부음을 그만큼 많이 받게 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주변의 목회자나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분들을 보십시오.
믈론 처음부터 드러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고난을 깊게 겪으신 분들, 광야생활을 더욱 더 철저히 하신 분들이 기름부으심이 더욱 강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도 지금 광야생활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어 원망하며 주저앉고 싶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지만, 더욱 강하고 깊은 기름부으심을 기다리며 오늘도 소망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또한 이 고난 뒤에 오는 축복을 미리 보았기 때문에, 그 은혜와 축복을 포기할수 없어 그 때를 기다리며 오늘도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실이 자꾸만 힘들게하고 여러분들을 실망시키고 좌절시키고 주저앉게 만듭니까?
그 고난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그 고난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예수님께 눈을 돌리시 바랍니다.
고난을 변장된 축복이라고 부르는 분도 있지만, 고난 자체가 축복이 될수는 없습니다.
애굽을 나와서 광야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 허다한 사람들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다가 광야의 모래에 묻혀버린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게 닥쳐온 고난이, 내게 펼쳐진 광야생활이 나를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게 할 수도 있지만 그 광야에서 넘어져 묻혀 버릴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붙잡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선 자에 한해서만 고난이 축복으로 변하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물론 고난중에도 항상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지치고 힘들어, 상처받고 넘어진 때에만 주님의 손을 붙잡지 마시고 주님과 나란히 걸을 때에도 주님의 손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나라 들어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주님 붙잡은 그 손을 놓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 사람들, 로마의 학정하에 소망이 끊기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겠다 하고 광야로 나왔던 것입니다.
날마다 짐승을 잡아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회당과 성전이 있었지만, 그곳 제사장들로부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침례요한이 요단강 북쪽 광야에서 말씀을 선포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본문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라고 하였는데,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존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간 오랜 광야생활속에서 연단되어 아픔과 억울함과 분노등 마음속에있던 모든 불순물들이 빠져나가고 오직 정금처럼 되어, 자신은 사라지고 그의 생각이나 삶에 오직 하나님의 흔적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투명하여, 자신의 성격이나 생각이나 특성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형상만이 그에게 나타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오직 주님의 음성, 그가 하는 말이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된 상태인 것입니다.
찬송가 204장에,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라고 하였는데, 이 찬송가 작가도 이러한 체험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말씀을 듣는자들은 그의 생각이 아니요 자신이 연구한 바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침례요한이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가운데 압도되어 살아계신 하나님과 Encounter, 면전에서 만나는 체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Encounter 를 지금까지 두번 체험하였는데, 한번은 2008년 2월에 집에서 그리고 다른 한번은 2009년 1월에 기도원에서 체험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시는데, 제가 공중에 붕 뜨게되고, 이 세상은 간곳없고 다른 세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주님의 어루만져주심, 이 체험이 있었기에 억울함도 고난도 이겨낼수 있었고, 앞으로 남은 고난도 능히 이겨낼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의 강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체험을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욥처럼, “내가 말로만 듣던 준미을 이제는 제 눈으로 뵙니이다” 라는 고백을 하실수 있으시기를 가도드립니다.
단순히 예수믿고 구원받아라가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할 테니 당신도 만나기를 바랍니다 라는 식으로 전도하고 간증하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던 그들, 헐벗고 굶주리던 그들에게 이 광야길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씀을 듣고자 이 험한 길을 목숨을 걸고 찾아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따뜻한 잠자리를 박차고 거친 황무지를 찾아나오는 이 모습,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을 둘수 없어,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 생상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을 면전에서 뵙기위해 이 멀리까지 나아오는 모습을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멀고 험한 여행길에 지치고 헐벗어 비틀거리며 찾아온 그들을 향하여 침례요한은 “여러분들, 먼 예루살렘에서 이곳까지 잘 오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 죄를 회개하라 그리고 침례를 받음으로써 너희 죄를 씻음받아라” 고 합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라” 는 책망입니다.

그들이 생각할때, 정작 회개할 사람들은 로마인들과 로마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유대인 매국노들, 그리고 세금을 착취하는 세리들인데, 그래도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그 먼길을 고생고생 하면서 힘들게 찾아왔는데, 칭찬은커녕 기껏 하는 소리가 “회개하라” 입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런 교회 다니고 싶겠습니까?
저가 안수기도라도 해 주든지 축복기도라도 해 주면서,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너희를 지키시리라 라는 등의 예언의 말씀을 주시든지 할 것이지,
지치고 굶주려 다 죽게 생긴 사람들에게 기껏 한다는 소리가 “회개하라?” 내가 기껏 이 말을 들으러 여기까지 만사제쳐놓고 이 먼 길을 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신비하고 오묘한 말씀, 기적을 일으키는 말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는 말씀을 들으로 왔지 그 까짓 책망의 소리를 들으려 온줄 아십니까?” 라며 불평과 불만을 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멘” 하며 기꺼이 요단강으로 따라나와 회개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일반 인들은 물론 군인들과 세리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백성들을 지도하며 성경을 가르치던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평생동안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쳐왔지만, 아직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성경학자요 제사장급들이었던 바리새인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란 방향을 인생 길을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회개는 구체적으로 네 가지 단계의 행동을 통해 일어납니다.
먼저 자기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데 어떻게 회개를 합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으면, 이제는 그 죄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잘못하였습니다,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그 죄를 고백하고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고백한 것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입술로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으로 회개는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듯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한순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왜 회개가 예수님을 위한 지름길을 내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교만하고 단단한 마음이 아니라, 부서지고 회개한 심령에 들어 오시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더러운 마음, 악한 마음, 음란한 마음, 교만한 마음, 투명하지 않은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실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쉽게 빨리 받아드릴수 있도록, 침례요한을 먼저 보내셔서 그 일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 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군인들, 머슴들, 종들, 선생, 경찰, 정치인들, 국회의원, 장관, 군수, 면장, 부자 가난한자 모두들 나와서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침례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침례요한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인줄 알고 그를 따라다닙니다.
그를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 큰 떼를 이루게 됩니다.
거기에는 제사장등 유대사회의 거물급들도 있습니다.
그때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허리를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침례 요한은 이미 오실 메시아처럼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지않는 광야에 있었지만, 그를 보려고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실 메시아의 신발을 풀어드릴 존재도 못되는 부족한 자다” 라며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정상에 있다고 생각될때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자신은 겸손하려고 하여도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아니합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부추기고, 그 덕에 자신도 무엇인가 한자리 하거나 무슨 이득을 취하려고 그 앞에서 아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들어가서 마침내는 비참하게 추락하게 되는 것을 주변에서 너무 자주 목격합니다.

겸손의 자리에 있는다고 하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침례 요한은 바로 그 자리, 자기의 설 자리도 알았고, 사명의 자리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임지를 보니까 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물론 장소만 조금 다를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로마의 성도들과 상황은 비슷합니다

불안과 공포에 떨던 그분들은 마가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 되십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반듯이 겨쳐야 할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을 통하여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광야로 나왔던 유대인들을 생각하며, 지금 광야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들도 힘을 얻으십시오.
그분들처럼 회개의 침례를 받으시고,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얻으십시오.”

불안에 떨던 로마의 성도들은 마가를 통하여 선포된 이 말씀을 듣고 힘을 얻고 새생명을 얻어 마침내는 목숨까지 내놓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로마의 성도들을 변화시킨 이 말씀, 소망이 끊기고 불안과 공포에 떨던 그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고, 새 소망을 가지고 생명을 다바쳐 믿음을 지키게 하신 이 말씀,

우리도 그 분들처럼 갈급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는다면 오늘 우리도 그분들처럼 예수님 안에서 힘을 얻어 이 광야생활을 기쁨으로 이겨낼수 있을 것입니다.
저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며,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나를 맞이하로 오실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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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3 2010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Published by Jin Kim under 마가복음, 주일 설교

마가복음 01:01-01절

Feburary 14/2010

 

마가복음은 서기 70년경 로마의 어느 시골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는 로마 황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핍박이 아주 심했을 때입니다.
특별히 64년경부터 네로 황제는 발작적으로 크리스천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핍박은 심해지고 그로 인하여 순교하는 성도들은 늘어만 갔습니다.
극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로마의 성도들은 카타콤부라는 동굴속에 모여 주님께서 속히 오셔서 네로황제를 심판하시고 믿는자들에게 면류관을 주시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침묵하셨고, 핍박은 멈추기는커녕 날로 더 드세져 갑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베드로 사도는 로마에서 체포되어 십자가 형으로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옥생활을 하시던 바울사도는 로마 시민권자이었기 때문에 십자가 형이 아닌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할지라도 베드로 사도나 바울사도만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 분 들마져도 이렇게 무참하게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그 분들이 순교를 당하면 세상이 금방 뒤집히고 황제가 중병에 들던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든지, 무엇인가 큰 이변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태양은 오늘도 동에서 떠서 서로 집니다.
이러한 암울하고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로마의 성도들은 다음의 생각들에 빠져 고민하고 방황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정녕 우리를 버리셨는가?
로마에 있던 유대교인들은 유대교가 탄압의 대상에서 제외된 특권을 계속해서 누리기 위하여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기독교를 탄압합니다.
기록에 보면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할 때 이 유대교인들이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유대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치광이요 하나님을 경멸하는 신성 모독죄에 빠진자들이라며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핍박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며, 유대교로 전향 오도록 권하면서, 듣지 않으면 로마에 밀고하겠노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특히 유대교에서 온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라며 예수님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다시 전향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급기야 유대교의 제사야 말로 완벽하지 못한 인간 제사장들이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제사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은 평생을 날마다 제사를 드리지 않느냐.
우리의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은 아무런 흠이 없으신 완전하신 제사장이요, 또한 그 완전하신 분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서 완전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이상의 제사가 필요없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고가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예배드리고 그분께 헌물을 드리는 것이다 라며 반박하는 편지를 각 교회마다 보내는데 이 편지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없으신가?
로마 황제의 숭배는 당연히 우상 숭배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처형시키는 것은 당연히 사악한 짓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던 역대 로마 황제들은 사단에게 쓰임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크리스천들이 쓰러져 갔고, 현재 남아있는 크리스천들도 불안과 공포속에 나날을 살고 있는데, 왜 주님은 오시지 않는가?
왜 주님은 우리를 이 환난에서 속히 구원해 주시지 않는가?
정말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없으신가?
예수님도 다른 우상 들이나 마찬가지로 무능하단 말인가?

셋째, 교회에서 빠져나와 그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너무도 위험하고 자칫하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니까, 우선 당분간은 예수 안믿는 사람들처럼 살다가, 상황이 좀더 나아지면 다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곧 무너지고 다시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넷째, 앞으로 몇일 아니 몇달안에 꼭 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시겠지.
마태복음 25장의 미련한 다섯신부처럼, 늦어도 언제까지는 오시겠지 라며 시한부적인 종말론적 신앙에 빠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해가 생각보다 오래 가면서 이러한 신앙은 상처와 실망만 안은채 무너져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데살로니카 사람들 중에 종말이 곧 오는데 무엇하러 일은 하느냐면서 이집 저집 찾아가 폐를 끼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데살로니카 후서 3:10절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하라” 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곧 다시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하되 그 날만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말고, 모든 일을 정상적으로 열심히 하면서 기다리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다섯째, 순교가 두려워 숨어서 두려움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믿지 않을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병사들에게 발각되면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에 숨어서만 신앙을 지킵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그들은 지쳐버리고 신앙은 퇴색해져가게 되어버렸습니다.

6. 현실의 불안하고 암울한 상황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교회를 지키며 계속해서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곧 오실 주님, 그리고 그 심판을 기다리며 신앙의 절개를 지켜 나갔습니다. 오늘 당장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더 좋은 나라로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더 큰 영광과 상급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교회 내에서 여러 부류의 교인들이 서로의 신앙의 갈등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매우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황, 불확실한 미래앞에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이 시기에 위의 모든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가장 절실하게 찾아오는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였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내가 만난 그분, 내가 믿는 그분이 진정으로 Son of God,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인가?
그분이 과연 우리의 구세주 되신단 말인가?
만일 그러한 확신만 있다면 그들은 목숨까지도 버리면서 주님을 따를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면서 그 믿음까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마가가 로마에 있는 로마의 교인들을 모아놓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시다” 라며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는 베드로로부터 들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또한 체험한 것을 토대로 주관적이 아니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 합니다.

그날 마가를 통하여서 주신 기쁜 소식, 이것이 바로 오늘부터 같이 묵상하고 그간 식었던 신앙을 되찾아 핍박의 칼날을 피로서 맞섰던 믿음의 선진들이 체험한 은혜와 용기를 받고자 하는 마가복음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엄청난 시련과 고난중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마가는 그 첫 마디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즉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여태까지 믿었던 그 믿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환난중에 있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겠습니까?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저 영원한 천국의 소유자임을 확신하며 주님을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주저함 없이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순교하는 그 마지막 순간, 고통과 공포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 천국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맞이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믿을 수만 있다면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우리들도 저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두려움 없이 그 날이, 축복의 그 날이 올 때까지 능히 믿음을 지켜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가는 이어서, “복음의 시작”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복음이라 번역된 헬라어 “유왕겔리온” 은 “Good News, 좋은 소식, 기쁜 소식” 입니다.
그리고 “유왕겔리온” 은 고대 도시국가시대에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기쁜 소식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사무엘 하 18:1절 이하를 보면, 다윗의 병사들이 압살롬의 병사들을 만나 싸울때 다윗은 집에서 전장에서 소식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한편 압살롬을 살해하고 전쟁에 승리하자 요압은 나팔을 불고, 집에서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는 다윗에게 승전소식을 전하라고 전령을 보냅니다.
그 전령을 “헤럴드” 라고 하고, 그 전령이 가지고 온 기쁜 소식,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가 바로 기쁜소식 “유왕겔리온” 입니다.

그런가 하면 B.C490 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사신을 보내 페르시아에 무조건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 같은 페르시아의 항복요구에 그리스는 거부하며 사신을 우물 속에 넣고 매장시켜버렸다고 합니다.
이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는 배 600여척을 동원하여 병사 10만 여명을 파병하여 그리스 정벌에 나섰습니다.

조그만 도시국가 아테네가 이 많고 강한 병력을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은 아테네는 지략이 뛰어난 용장 “밀티아데스” 장군 지휘하에 불과 1만명의 기갑병으로 페르시아 원정군을 향하여 출격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아테네 동북방 42.195Km지점에 있던 마라톤 평원에서 양군이 만나게 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싸웠던 아테네 병사들은 페르시아 강군을 물리칩니다.
완전히 패하여 멸망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던 그들에게 이 승리는 너무도 흥분하게 하였습니다.
너무도 좋은 이 기쁜 소식, 유왕겔리온을 전하기 위해 전령 “필리피데스” 는 마라톤 평원에서 약 42.195Km의 거리를 쉬지 않고 단숨에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는 수만의 아테네 시민에 둘러싸인 가운데 “우리 아테네가 승리했습니다” 이 한마디를 전하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처럼 유왕겔리온은 생사가 달린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승전 소식이 전쟁에서 이긴 백성에게는 더 없이 기쁜 소식, 복음이지만, 전쟁에서 진 백성들에게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할 절망이요, 엄청나게 큰 고통의 임박함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이 전쟁에서 진 페르시아의 핏줄을 이은 오늘날 이란 사람들은 마라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단어였었는데, 나중에는 황제의 탄생이나 대관식 소식 등 황실에 큰 경사가 났을 때, 혹은 국가적인 큰 경사가 났을 때에도 그 소식을 “유왕겔리온” 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황제의 전용어가 되었으며, 황실에 경사가 났을 경우 황제는 백성들에게 “유왕겔리온” 을 선포하면서 특별 선물을 하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왕겔리온” 이 선포되면, 백성들은 황제의 하사품에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이처럼 유왕겔리온은 단순한 기쁜 소식이 아니라, 선물이 따르는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황제가 독점하여 사용하던 이 “유왕겔리온” 을 바울사도는 담대하게 “예수가 곧 그리스도다” 이것이 “유왕겔리온이다” 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가 역시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포로 마가복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난후, “유왕겔리온” 은 더이상 황제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요 결국 교회의 용어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어두움에, 불안감에, 절망에 빠져있던 로마의 성도들에게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가 바로 승전소식,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시요, 지금 우리를 학대하고 있는 저 로마도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구출하여 당신의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오늘 “예수님이 이미 사단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셨다” 는 이 기쁜 소식을 너희들에게 전하노라 라고 마가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결단의 시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쁜 소식, 나쁜 소식, 슬픈 소식등 여러가지 소식들을 듣게 됩니다.
NEWS 가 무엇입니까?
North East West South 에서 오는 소식들입니다.
그런데 동서남북에서 오는 소식들은 온통 비리와 비극과 수치와 절망과 아픔과 분노를 일으키는 소식들입니다.

그렇다면 기쁜 소식 중 여러분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 유왕겔리온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소식은 무엇입니까?
가장 사랑하는 소식은 무엇입니까?
나의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소식은 무엇입니까?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의사로부터 오는 소식입니까?
직장에서의 승진 소식입니까?
사업이 엄청나게 잘 된다는 소식입니까?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합격되었다는 소식입니까?

물론 의사로부터, 직장으로부터, 학교로부터 오는 소식들도 좋은 소식 기쁜 소식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 유왕겔리온이 되어야 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곧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곧 나의 구세주입니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실의에 빠진 로마의 성도들은 이 소식이 바로 그들이 지금까지 들어본 소식 중 가장 기쁜 소식, 유왕겔리온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 분들은 감격하였고 눈물을 흘리며 흥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우리의 구세주이신가? 라는 회의적인 신앙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이요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시다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에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순교를 각오한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 당시 로마의 성도들처럼 갈급하게 주님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분들처럼 저 천국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그 분들처럼 식어졌던 믿음이 되 살아나게 될 것이요, 마침내는 목숨까지도 내 놓을 수 있는 믿음의 용사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리도 전서 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한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사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시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로마의 성도들처럼 이 기쁜 소식으로 위로 받고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소식으로 말미암아 앞날에 대한 밝은 비전으로 들뜨고 흥분된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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